문무대왕 수중릉 - 감은사지 - 나정 해변 - 감포 (10.8km)
* 해파랑길 11코스
새벽 5시에 문무대왕릉 앞 바닷가로 나갔다. 바람도 불고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간절하게 소원을 비는 두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고, 지난밤부터 벌인 굿을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해변 자갈밭 곳곳 타고 있는 촛불에서 지난밤 많은 굿판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경주시에서는 무속행위를 근절하겠다고 하지만 단속이 쉽지 않은 것 같았다. 영험하고 신기가 충만하다고 소문났으며, 무속인들에겐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하니 좋은 방안이 나왔으면 좋겠다. 바이칼의 부르한 바위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적 장소로 인정받을 수는 없을까. 죽으면 용이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동해바다에 묻어달라고 했던 왕의 유언은 무엇보다 강력한 스토리텔링이기에 세계인들에게 충분히 통하지 않을까.
대종천을 건너니 감은사 탑이 눈에 들어왔다. 아, 감은사 탑. 멀리서 봐도 멋지고 아름다웠다. 가람은 사라지고 쌍 탑만 덩그러니 남았지만 볼 때마다 그 상쾌함에 가슴뛰는 흥분을 느낀다. 탑이 주는 웅장함과 균형미는 가히 최상이다. 언젠가 밤에 와서 보고 그 기묘하고 신비로움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짜릿함을 느낀 적이 있다. 통일신라 사람들의 예술성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이 절을 짓고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라 이름 지었다는 절. 문무대왕은 왜구 침입을 막겠다는 염원으로 동해 용왕이 되겠다고 했고 그 아들인 신문왕은 감은사를 지어 아버지의 뜻을 후대까지 전하려 했던 것일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이런 자기 희생적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통일 후에도 오랫동안 국가가 지속되었던 것도 이런 호국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하대 신라에 와서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의 왕위 다툼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국력이 쇠하여 망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옛날 감은사 앞까지 바다물이 들어오고, 대종천은 큰 강이었다고 한다. 감은사 올라가는 계단 아래 축대에서 배를 정박할 수 있는 돌 구조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대종천이란 이름도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이 황룡사 9층 탑을 불태우고 황룡사 대종을 뗏목에 실어 날랐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약 800년 전 고려시대에는 바닷물 수위가 지금보다 많이 높았다는 것이 아닌가. 지구온난화가 계속 진행되면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올라가 많은 육지가 바다에 잠길 것이라 걱정하는데, 그 당시가 지금보다 지구 온도가 높았다는 것인가. 아니면 땅이 서서히 융기하였다는 것인가. 궁금했다.
이른 아침이고 평일인 탓인지 주차장은 텅 비었고, 가게들도 문이 닫혀 있었다. 경주 황금빵 포스타가 빛이 바래고 찢어진 것을 보니 장사를 하지 않은지 오래된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멋진 석탑이 우뚝 서있고, 훌륭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곳임에도 쓸쓸하게 느껴짐은 못내 아쉬웠다. 인기척은 없고 개소리만 요란한 좁은 길을 따라 감은사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화살대로 쓰였던 이대 숲이 보였고, 군데군데 보라색 꽃을 단 등나무가 눈에 띄었다. 사람이 산 흔적이 느껴졌다. 산길을 내려오자 '그 스승 그 제자'라고 새긴 까만 안내석 뒤로 비석 세 개가 사이좋게 서 있었다. 한국 고고미술을 개척하고 기반을 공고히 한 우현 고유섭 선생과 그의 제자 초우 황수영 박사와 수묵 진흥섭 박사를 기리는 후배들의 헌창비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어려운 시기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음을 평가하고 지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분 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명성에 어울리게 번듯한 명당자리를 차지해도 좋으리만은 길옆 모퉁이에 겸손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새벽 6시에 숙소를 나서 오전 9시쯤 아침을 먹었다.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음식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운 좋게도 한식뷔페 음식점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식사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여사장이 친절하게 우리를 맞았고, 음식도 정갈하게 준비돼 있었다. 이곳에 음식점이 문을 연 것은 바로 앞 골프장 손님들 때문이었다. 집 떠나고 사흘째 담백한 집 밥이 그리웠었는데 갓김치, 쑥국, 미나리 무침, 상치쌈 ...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후식으로 직접 담은 식혜도 한 병 덤으로 받았다. 여사장은 전남 광양이 고향이라고 했다. 내 고향 하동과는 섬진강을 사이에 둔 곳이기에 더 반가웠다. 혹시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오빠가 그 사람과 농협 조합장 선거에 2번이나 붙어 떨어졌다고 했다. 세상 참 좁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어촌마을벽화, 건조 미역, 용구멍바위, 할배와 할매 소나무, 각시붓꽃, 갯완두... 천천히 식후경 삼아 걷다 보니 감포항에 도착했다. 아침 경매시장이 끝났는지 한산했고, 지게차로 갓 잡은 생선을 담은 커다란 상자를 운반하는 중이었다. 작업인부에게 무슨 물고기 나고 물었더니, 청어라 했다. 감포항은 구워 먹어도 맛있고, 말려 과메기로 먹어도 일품인 청어 집산지였다. 감포라는 명칭은 지형이 감(甘) 자 모양으로 생겼고, 또 감은사가 있는 포구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가 축약되어 감포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감포는 경주권역 동해안에서 가장 큰 어항이며,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초기 신라시대부터 역사가 전해지고 석탈해왕의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감포는 아무래도 일제시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감포는 일본인 거류지 였으며, 경주 인근의 문화재 도굴과 밀반출이 은밀하게 이루어진 곳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감포를 조선 수탈의 거점으로 개발했다. 방파제를 설치하고 등대를 세워 항구로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게 개발한 후, 일본의 영세 어민을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경관이 빼어난 이곳은 일본인들의 고급 유흥지로 변모되었다. 당시로는 드문 수족관도 있었고, 여급이 딸린 최고급 여관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인 송대말에서 보는 일출은 일품이었던 모양이다. 조선 총독부 우정국에서는 '아침 해가 떠 오르는 감포 송대 끝'이라는 기념우표와 엽서까지 발행하였다.
아름다운 내 고향 감포.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다.
하지만 우리의 고향 감포는 더 더욱 그리운 고향이다.
내 고향이 비록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조선 반도로부터 강제 수탈과 영구 정착 목적으로
감포항을 근대화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과거역사에 향토사이다.
잘못된 역사는 후손들에게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육하고
자랑스런 역사는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는 것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고향을 더더욱 발전시키고
살기 좋은 감포를 만들기에 이 사진을 보는
모든 향토인들께서는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송대말 등대 수족관 및 감포항 변천사 안내문에 있는 글이다. 감포의 굴곡진 역사를 몸소 경험한 원로께서 고향 감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후대에 전하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해파랑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파랑길5. 프랜드리한 울산 태화강 (0) | 2020.10.21 |
---|---|
해파랑길6. 다시 걷고 싶은 강동사랑길 (0) | 2020.10.21 |
해파랑길8. 근대도시 구룡포 가는 길 (0) | 2020.10.21 |
해파랑길9. 연오랑 세오녀 길 (0) | 2020.10.21 |
해파랑길 10. 포항항과 포항제철 (0) | 2020.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