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 -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 흥환간이 - 호미곶(박) - 다무포 고래마을 - 구룡포 (35.0km)
* 해파랑길 16 15 14 코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포항역에서 210번 버스를 타고 동해면사무소 앞에서 내렸다. 해파랑길 포항구간 트레킹을 구룡포에서 출발하지 않고 도구 해변에서 출발해 구룡포로 가기로 했다. 걸을 거리, 숙소 등을 감안하여 거꾸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지난번 경주구간 마지막 코스도 숙소가 마땅치 않아 양포에서 구룡포로 택시로 이동해 역으로 트레킹을 했었었다. 무엇보다 코스 결정의 결정적인 요인은 호미곶에서 1박을 하고 일출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구룡포에서 출발하면 호미곶은 숙박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다. 날씨는 너무 좋았다. 하늘은 맑고 파랬고, 두둥실 뭉게구름도 피어올랐다. 도구 해변에 들어서니 북쪽으로 포항제철이 바다 한가운데까지 뻗어있고, 동남쪽으로는 시원하게 동해 바다가 펼쳐 저 있었다. 해파랑길 14,15,16코스는 포항시에서 관리하는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과 겹친다. 이 지역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 전설의 무대다. '도구'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옛 명칭인 '도기야'에서 유래되었다. 해안가 방파제, '연오랑과 세오녀'와 관련된 설화 내용을 소재로 한 벽화와 글들이 눈길을 끌었다.
신라가 아직 부족 연맹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157년, 연오랑세오녀 부부는 일본으로 건너 가 왕과 왕비가 되었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신라왕이 사신을 일본에 보내 연오랑과 세오녀에게 신라로 돌아오기를 청했다. 그러나 연오랑은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내 아내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져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예전과 같이 빛을 되찾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신이 신라로 돌아와 연오랑이 시킨 대로 했더니 해와 달의 정기가 돌아와 다시 광채를 비추었다.
포항에는 연오랑세오녀 설화와 관련된 스토리가 많다. '영일'이란 지명도 관련이 있으며, '일월지'라는 연못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서는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해와 달을 다시 맞이한 일월대를 세우고, 세오녀가 짠 명주 비단을 보관했던 귀비고란 창고도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정월 초하루 호미곶 해맞이 행사도 이 설화에 연원을 두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까지 실린 연오랑세오녀 얘기는 단순한 설화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와의 교류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포항 시내를 흐르는 형산강 모래사장에는 예부터 사철이 많이 났고, 이를 바탕으로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연오랑세오녀는 당시로는 선진 문명이었던 제철기술을 지난 부족 국가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부족 연맹체 맹주로서 세력을 넓혀 가던 신라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전쟁에 패해 일본 열도로 이주한 것은 아닐까. 포항에서 동해바다를 건너 바로 마주 보는 곳이 일본의 시마네 현 이즈모 지역이다. 이즈모 지역은 일본 고대 문명의 대표적 지역 중 하나고 그 문명 발달의 주역은 한반도로부터 이주해온 도래인이었을 것이다. 포항제철 건설에 기술을 제공한 신일본제철 회장은 "일본이 은혜를 갚은 것이다"라 했다고 하니, 한일 간에는 반목과 갈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돕는 우호적 협력교류도 존재했던 것이다.
연오랑세오녀 벽화, 스토리 텔링 글을 읽으며 걷다 보니 문을 연 음식점이 눈에 띄었다. 오전 11시, 때는 일렀지만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때가 이르더라도 식당이 보이면 들어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회덮밥에 막걸리 1병을 시켰더니 중년의 여사장은 서울에서 왔냐고 물었다. 경기도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여기서는 회밥이라 하는데 그쪽 사람들은 회덮밥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회밥은 푸짐한 회위에 밥을 덮어 주는데 비해, 서울 쪽 회덮밥은 밥 위에 회를 덮어 주는 차이가 있었다.
길은 해안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다내음을 맡으며, 때로는 거친 파도에 신발을 적시기도 했다. 지금까지 해안길은 찻길이 많았었는데, 이곳은 대부분 해안 산책로였다. 길을 낼 수 있는 곳은 넓고 큼직한 돌을 깔아 만들었고, 길을 낼 수 없는 절벽에는 나무데크 길이 놓여 있었다. 다른 구간에 비하면 너무 깨끗하고 관리가 잘 돼 있으며, 바다 친화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에 포항 해병부대 순찰병들이 다녔던 '초병의 길'을 개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선대, 군상 바위, 신랑각시 바위, 먹바우, 선바우, 힌디기... 연오랑세오녀의 설화가 담긴 바위도 많고 이런저런 사연이 담긴 바위들도 많았다. 포장을 하지 않고 상태계를 살려 트레킹길을 열었기에 긴 세월 동안 깎기고 다듬어진 자연의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특이한 바윗돌이 많은 것은 이 지역이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지형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붉게 핀 해당화도 눈길을 끌었지만 트레킹 길 중간중간 나를 반긴 것은 갯메꽃과 갯무였다. 야생 나팔꽃이라고 할 수 있는 메꽃은 척박한 모래밭, 자갈밭에 무리 지어 아침 햇살을 받아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살색 고운 어린아이가 몸은 숨기고 얼굴만 방긋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비해 길가에 제법 높이 자란 갯무는 어설프게 색조화장을 하고 자잘 자잘 손 흔들며 환영하는 것 같았다.
또 눈여겨볼 식물은 해국과 모감주나무였다. 군데군데 군락 지어 자라고 있는 해국은 복슬복슬 초록색 잎만 달고 있어 아직은 볼 품이 없었다. 하지만 가을 따가운 햇살 아래 보라색 꽃이 예쁘게 필 것이고, 트레커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생태적,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초여름에 황금빛 노란 우산을 펼쳐 든 것처럼 기품 당당하게 꽃이 피며, 그 열매는 아주 단단해 스님들의 염주알로 쓰인다. 모감주나무는 2018년 문재인 대통령께서 평양 방문 시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이기도 하다.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도로변 가파른 절벽에 있었고, 산사태 방지 철조망이 처져 있어 접근할 수 없었다. 직접 볼 수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천연기념물 보호 차원에서는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후 5시쯤 호미곶에 도착했다. 우선 숙소를 정하고 저녁 식사할 곳을 찾았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았지만 문을 연 식당은 없었고, 불이 켜진 게스트하우스가 눈에 띄어 들어갔더니 중년의 사장이 뭔가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할 수 있나고 물었더니 된다고 했다. 내가 그날 첫 손님이라고 했다. 숙박을 하는 트레커도 아무도 없었다. 트레킹 하기 좋은 계절인데도 손님이 뚝 끊겼다니 내가 괜히 걱정됐다.
한반도의 가장 동쪽,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호미곶. 완만한 구릉지대였다. 지금까지 봐온 가파른 산비탈과 해안 절벽과는 달리 제법 큰 마을도 형성돼 있고, 밭에는 보리가 심겨 있었다. 지형적으로 보면 오래전에 바다 밑 땅이 솟아 오른 넓고 평탄한 해안 단구다. 호미곶 해맞이 광장은 그 단구 위 동해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조성돼 있다. 2만 명분 떡국을 끓일 수 있는 전국 최대 크기의 가마솥도 광장 가장자리에 있고, 무엇보다 그 유명한 상생의 손이 광장과 앞바다에 마주 우뚝 서있다.
다음날 아침 5시에 숙소를 나서 해맞이 광장으로 갔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멀리 수평선을 따라 낮게 구름이 하늘을 가려 아쉽게도 일출 오메가는 볼 수 없었다. 호미곶에서 구룡포 가는 길은 남서쪽 방향이라 해를 등지고 걸어 눈부시지 않아 좋았고, 풍경을 선명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다. 파란 하늘 아래 거친 파도가 만들어 내는 하얀 포말 그리고 포구 마을의 하얀 집들이 만들어 내는 풍광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외국 여행에서 산과 들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했었는데, 낯설지 않은 우리의 풍경도 놀랍도록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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