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포 - 조사리간이해수욕장 - 화진 - 장사(박) (11.6km)
오전 11시쯤 월포해변에 도착했다. 월포해변 풍광은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현무암 바위돌이 특이한 풍경을 연출하고, 멀리 순하게 생긴 내연산 산자락 품에 안긴 월포마을은 그림 같았다. 월포마을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횡재를 만났다. 좀 이르기는 해도 적당한 음식점이 있을까 하고 마을 안 길을 걷다가 소바집을 발견했다. 들어가니 아직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주방장 겸 여사장은 음식 준비에 바빴다. 육수를 내고 소바를 삶아야 하니 좀 기다리라고 했다. 메뉴판을 보니 특이한 게 눈에 띄었다. '사리 추가는 주문할 때만 받습니다.'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믿음이 가기도 했다. 소바는 정갈하게 나왔고, 맛도 좋았다. 함께 나온 튀김도 바싹한 식감이 아주 좋았다. 정오 무렵이 되자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내 빈자리가 없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그것도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에서 맛있는 소바를 먹었다.
월포에서 기분좋은 점심을 하고 해안로를 따라 걸었다. 오후의 바닷가 햇살은 강렬했다. 가끔 눈에 띄는 펜션은 문을 닫았고, 대부분 바닷가 회집은 영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뜨거운 뙤약볕 아래 보리타작하듯 열심히 도리깨질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고기잡이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물에 걸린 해초류를 타이어 고무줄을 매단 도리깨로 털어내고 있었다. 옆을 지나자니 괜히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조사리간이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순했고, 맑은 옥빛이었다. 그때까지 봐온 거친 동해바다 같지가 않았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풍경에 잡혀 한 참 동안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어디까지 가요?"
나보다 연세가 지긋한 여성 분이 물어왔다. 일행은 비슷한 연배의 남성 두 분과 세 사람이었다. 분위기로 봐서 같은 동네에서 자랐거나 같은 학교를 졸업한 친구지간 같았다. 해파랑길에서 여행객을 만나기 쉽지 않았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더더구나 만나기 어려웠는데 반가웠다. 코로나 판데믹이 끝나면 해파랑길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 걷기 열풍은 제주올레길이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고 힌트를 언어 구상하였다고 하는데, 최근 들어 많은 지역에서 순례길을 열어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걸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직 숙박 시설 등 편의시설이 부족한 점이 있으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풍광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아 굳이 해외로 가지 않더라고 마음 편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앉은 줄다리기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과의 소통'
벽화가 눈에 띄는 어촌마을에 도착했다. 화진리 구진마을이다. 잘 가꿔진 향나무 숲 속에 앉은줄다리기 사당이 있다. 앉은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날 동서로 편을 갈라 게다리 모양의 줄을 당기는 민속놀이인데, 부녀자들만 참여하여 앉아서 당기는 것이 다른 줄다리기와 다르다. 줄을 앉아서 당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마을 주민들은 줄을 당기다가 넘어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사고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여성들만 참여한다는 것도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방식이다. 줄다리기하는 여성의 모습이 흡사 출산하는 여성을 연상케 하는데,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중단된 적이 없는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구진 마을 앉은 줄다리기 역사는 아주 오래됐을 것이고 어쩌면 어촌마을 기쁨과 애환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동해안에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선사시대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고 한다. 구룡포 석병리 '성혈 바위'도 그중 하나이다. 바위 위에는 여성의 성기를 닮은 구멍이 여럿 있는데, 다산을 기원하는 성스런 의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풍경에 취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포항시 경계를 지나 영덕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 보는 해파랑길 안내 엠블럼도 나타나고, 길 양옆으로 블루라인이 그어져 있었다. 영덕 블루로드에 진입한 것이다.
야트막한 바닷가 언덕 소나무 숲을 지나자 해수욕장 모래밭에 배가 한 척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작전명 174호, 잊혀진 영웅들!'
선체 옆면에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었다. 출입을 막고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어 아쉬웠는데, 입구에 쓰여있는 안내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50년 9월 14일, 인천 상륙작전 시 북한군을 혼란시키기 위한 위장 양동작전으로 장사상륙작전이 실시되었다. 투입된 병력은 772명이었는데, 139명은 전사하고 92명은 부상당했으며, 나머지 병력은 대부분 구출에 실패하였고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북한군과 교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평균 나이 16세의 학도병이었으며, 2주간 군사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도병들의 이러한 숭고한 희생은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비밀작전이라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장사리 해변에서 유골과 선체가 발견되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으며, 감사하며 기억하여야 할 역사이다.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란 이름으로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전승기념관으로 조성된 배는 그 당시 작전에 투입된 민간인 소유였던 '문산호'를 복원한 것이다.
해파랑길에는 바다 풍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로 인해 생긴 사람들의 얘기도 만날 수 있었다. 그 얘기는 과거에 지나간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토양이 되었으며, 앞으로 살아갈 양식이 될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떤 얘기를 만날 수 있을까, 호기심을 품고 장사에서 긴 하루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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