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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해파랑길 12. 작전명 174호, 잊혀진 625 영웅들

 화진 - 장사(박)  - 삼사해상공원 - 강구 (15.8km)

 

 

'앉은 줄다리기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과의 소통'

벽화가 눈에 띄는 어촌마을에 도착했다. 화진리 구진마을이다. 잘 가꿔진 향나무 숲 속에 앉은줄다리기 사당이 있다. 앉은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날 동서로 편을 갈라 게다리 모양의 줄을 당기는 민속놀이인데, 부녀자들만 참여하여 앉아서 당기는 것이 다른 줄다리기와 다르다. 줄을 앉아서 당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마을 주민들은 줄을 당기다가 넘어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사고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여성들만 참여한다는 것도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방식이다. 줄다리기하는 여성의 모습이 흡사 출산하는 여성을 연상케 하는데,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중단된 적이 없는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구진 마을 앉은 줄다리기 역사는 아주 오래됐을 것이고 어쩌면 어촌마을 기쁨과 애환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동해안에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선사시대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고 한다. 구룡포 석병리 '성혈 바위'도 그중 하나이다. 바위 위에는 여성의 성기를 닮은 구멍이 여럿 있는데, 다산을 기원하는 성스런 의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풍경에 취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포항시 경계를 지나 영덕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 보는 해파랑길 안내 엠블럼도 나타나고, 길 양옆으로 블루라인이 그어져 있었다.  영덕 블루로드에 진입한 것이다.  

 

야트막한 바닷가 언덕 소나무 숲을 지나자 해수욕장 모래밭에 배가 한 척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작전명 174호, 잊혀진 영웅들!'

선체 옆면에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었다. 출입을 막고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어 아쉬웠는데, 입구에 쓰여있는 안내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50년 9월 14일, 인천 상륙작전 시 북한군을 혼란시키기 위한 위장 양동작전으로 장사상륙작전이 실시되었다. 투입된 병력은 772명이었는데, 139명은 전사하고 92명은 부상당했으며, 나머지 병력은 대부분 구출에 실패하였고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북한군과 교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평균 나이 16세의 학도병이었으며, 2주간 군사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도병들의 이러한 숭고한 희생은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비밀작전이라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장사리 해변에서 유골과 선체가 발견되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으며, 감사하며 기억하여야 할 역사이다.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란 이름으로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전승기념관으로 조성된 배는 그 당시 작전에 투입된 민간인 소유였던 '문산호'를 복원한 것이다.

 

해파랑길에는 바다 풍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로 인해 생긴 사람들의 얘기도 만날 수 있었다. 그 얘기는 과거에 지나간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토양이 되었으며, 앞으로 살아갈 양식이 될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떤 얘기를 만날 수 있을까, 호기심을 품고 장사에서 긴 하루를 마쳤다.   

 

 

 

 

 

영덕구간 해파랑길은 영덕 블루로드와 겹친다. 블루로드는 도보여행자를 위한 트레일로 쪽빛 파도의 길, 목은 이색의 길, 푸른 대게의 길, 빛과 바람의 길이 있다. 영덕을 가장 영덕답게 느낄 수 있도록 영덕군에서 조성하였다. 블루로드와 함께 가는 영덕 구간 해파랑길은 지금까지 해파랑길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포항 해파랑길이 거의 대부분 바다를 따라 쭉 이어졌다면 영덕 해파랑길은 바닷길뿐만 아니라 마을 안길도 지나고 논밭 옆 길과 숲길도 지난다. 좀 더 사람 냄새가 났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영덕 대게 문어, 선주가 직접 잡아 팝니다' 

광고 문구를 내건 가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게의 마을 영덕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게 철이 지나 한산한 분위기였지만, 유명한 TV 주말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 촬영지임을 알리는 입간판도 보였다. 그리고 생뚱맞게도 높은 빌딩이 마을 뒤편으로 어울리지 않게 불쑥 나타났다. 웬 고층 빌딩이 작은 해안 마을에 있지?  모퉁이를 돌아 언덕길을 올라가니 그 건물들은 호텔이었고, 맞은편에 삼사해상공원임을 알리는 거대한 원형 아치 문이 나타났다.  잘 가꿔진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니 넓은 광장이 나타났고, 문어를 형상화한 것 같은 큰 조형물도 설치돼 있었다. 너무 이른 오전이기 때문인지 뭔가 쓸쓸하고 어색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광장에서는 매년 1월 1일에는 신년 해맞이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