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한1리 (박) - 칠포 - 월포 - 조사리간이해수욕장 - 화진 (19.3km)
5월의 아침은 상쾌했다. 하늘은 파랗고, 바닷바람은 시원했고, 신록은 산 정상까지 연초록으로 물들여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아름다웠다. 아침 해를 등지고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선명했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왕복 8차선 용한해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벗어나면 다시 해안길로 접어들고, 곧이어 칠포 해수욕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곧이어 연안 녹색길로 접어든다. 과거 군사보호구역 해안경비 이동로였는데, 해파랑길 탐방로로 개방된 길이다. 이 길은 바다와 바짝 붙은 언덕을 따라 이어졌는데, 길에 들어서자 진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이른 아침부터 기분 좋은 향기를 뿜는 정체는 대체 누구일까. 찔레꽃과 인동덩굴 꽃이었다. 찔레꽃은 보리고개 배 골플 때 엄마 기다리며 따먹었던 꽃이고 인동덩굴 하면 겨울을 이겨낸 인내의 화신처럼 여겨지는 꽃이다. 그런데 햇볕 잘 드는 바닷가 언덕에 싱싱하게 잎을 내고 예쁘게 꽃을 피우고 향기까지 뿜고 있었다. 하얗고 노란 꽃을 달고 있는 인동덩굴 꽃은 여러모로 신기하다. 한 밤중에 하얀 꽃을 피우고 야행성 곤충을 불러들여 수정을 하고, 수정 후에는 노란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하아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순결한 신부가 각시나방을 불러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이 오면 노오란 모닝 드레스 갈아입고 '나 임신했어요'라고 커밍아웃을 한다. 그리고 노랑색 꽃은 꿀을 만들지 않는다. 참 새침한 모습이기도 하면서 배려심이 깊다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 아침에 찾아오는 벌들은 노랑꽃에는 앉지 않는다. 이렇듯 밤을 새워 꽃을 피우는 부지런한 찔레꽃과 인동덩굴 덕분에 아침부터 눈도 호강하고 코도 호강했다. 아침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향기의 바통은 쥐똥나무가 이어받는다. 이렇듯 5월의 해파랑길은 향기롭기까지 했다.
오전 11시쯤 월포해변에 도착했다. 월포해변 풍광은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현무암 바위돌이 특이한 풍경을 연출하고, 멀리 순하게 생긴 내연산 산자락 품에 안긴 월포마을은 그림 같았다. 월포마을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횡재를 만났다. 좀 이르기는 해도 적당한 음식점이 있을까 하고 마을 안 길을 걷다가 소바집을 발견했다. 들어가니 아직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주방장 겸 여사장은 음식 준비에 바빴다. 육수를 내고 소바를 삶아야 하니 좀 기다리라고 했다. 메뉴판을 보니 특이한 게 눈에 띄었다. '사리 추가는 주문할 때만 받습니다.'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믿음이 가기도 했다. 소바는 정갈하게 나왔고, 맛도 좋았다. 함께 나온 튀김도 바싹한 식감이 아주 좋았다. 정오 무렵이 되자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내 빈자리가 없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그것도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에서 맛있는 소바를 먹었다.
월포에서 기분좋은 점심을 하고 해안로를 따라 걸었다. 오후의 바닷가 햇살은 강렬했다. 가끔 눈에 띄는 펜션은 문을 닫았고, 대부분 바닷가 회집은 영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뜨거운 뙤약볕 아래 보리타작하듯 열심히 도리깨질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고기잡이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물에 걸린 해초류를 타이어 고무줄을 매단 도리깨로 털어내고 있었다. 옆을 지나자니 괜히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조사리간이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순했고, 맑은 옥빛이었다. 그때까지 봐온 거친 동해바다 같지가 않았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풍경에 잡혀 한 참 동안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어디까지 가요?"
나보다 연세가 지긋한 여성 분이 물어왔다. 일행은 비슷한 연배의 남성 두 분과 세 사람이었다. 분위기로 봐서 같은 동네에서 자랐거나 같은 학교를 졸업한 친구지간 같았다. 해파랑길에서 여행객을 만나기 쉽지 않았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더더구나 만나기 어려웠는데 반가웠다. 코로나 판데믹이 끝나면 해파랑길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 걷기 열풍은 제주올레길이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고 힌트를 언어 구상하였다고 하는데, 최근 들어 많은 지역에서 순례길을 열어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걸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직 숙박 시설 등 편의시설이 부족한 점이 있으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풍광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아 굳이 해외로 가지 않더라고 마음 편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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