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가고싶은 태백산.
지난 연말 매서운 한파 추위로 한차례 무산되고, 2022년 1월 4,5일 1박2일로 친구와 둘이서 다녀왔다.
새벽 7시 20분 동서울발 버스를 타고 고한사북공영터미널에 10시쯤 도착했다.
겨울 새벽 이른 버스임에도 만석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우리처럼 등산이나 여행을 가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고한읍을 관통하는 지장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마을은 지난 개발연대 시대 풍경이었다. 인터넷 지도앱에서 본 김치찜집을 찾아갔더니 아직 오픈 전이었고, 조금 더 걷다가 문을 연 '짜글이네집'에 들어 갔다. 짜글이는 돼지김치찌게였다. 음식점 주인에게 '새벽 버스가 만석이더라' 했더니, 카지노에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택시를 불러 만항재로 갔다.
오늘 산행은 만항재를 출발하여 함백산, 은대봉, 두문동재 까지 7.3km. 천천히 여유롭게 산행을 할 수 있는 코스다.
당초에는 금대봉을 지나 검룡소로 빠질까도 생각했었는데, 금대봉과 검룡소는 봄철 야생화가 만발할 때 가기로 하고 마음을 바꿨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잔잔했고, 걱정했던 추위도 견딜만 했다. 내린 눈은 거의 다 녹았고, 혹시나 기대했던 상고대마저 없었다. 하지만 맨몸을 드려낸 겨울산 풍경은 더 온전하게 온 몸에 느껴졌다.
함백산, 해발 1,572m의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6번째 높은 산이며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고봉 가운데 하나이다. 태백산보다 높지만 옛부터 태백산의 한 봉우리로 여겨졌다고 한다. 지금도 태백산 국립공원에 속하고 있다.
함백산 정상 바로 아래 안부에 기원단이 있다. 태백산 천제단은 국가의 부용과 평안을 기원했던 국가적 성지라면, 함백산 기원단은 백성들이 하늘에 제를 올리며 소원을 빌었던 민간 신앙의 성지였다고 한다. 6,7십년대 함백산 주변 탄광 광부들의 가족들이 지하막장에서 석탄을 캐던 남편과 자식의 무사안전을 위해 기도했던 곳이라 한다.
등산로는 백두대간길 일부다. 함백산 정상까지 오르막 구간은 좀 숨가팠지만 대체로 순했다. 계속 이어지는 능선길은 조용한 숲길 산책로 같았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햇볕을 받고 바람을 맞아 만든 가지의 곡선과 제각각의 수형을 감상하며 걷는 재미가 즐거웠다. 고지대고 능선길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들이 제법 굵은 나무로 성장한 것은 늦은 봄까지 눈이 오고, 때때로 안개가 마루금을 넘으면서 수분을 공급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오후 4시 조금 지나 두문동 고개에 도착했다. 산행시간은 거의 5시간, 너무 천천히 걸었나. 걷다 쉬다, 즐기면서 걸은 셈이다. 콜택시를 불려 태백시로 내려왔다. 태백에 산지 20년이 넘었다는 기사님은 말수가 무척 많았다. 탄광산업이 잘 나갈 때는 인구가 15만명 넘었고, 길에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다녔을 정도로 경제가 잘 돌았는데, 지금은 인구가 4만명 정도로 줄었다고 했다. 하지만 공기 좋고 집값이 싸 은퇴후 살기에 태백만한 곳이 없을 거라고 했다. 태백한우에 소주 한잔 할까하고 좋은 음식점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태백왔으면 태백에만 있는 물닭갈비를 먹어야한다면서 물닭갈비 거리에 내려 줬다.
화방재 부근 민박집에서 1박을 하고 아침 8시쯤 산행에 나섰다.
얼마쯤 걸으니 팔보암이라는 암자가 나타났고 곧이어 사길령 산령각이 나타났다. 팔보암에는 단군성전과 대웅전이 한 건물에 나란히 있었고, 삼족회전국연합회 간판이 걸려 있었다. 무속적인 성격이 강한 암자같았다.
사길령은 옛날 경상도와 강원도를 잇는 고개로 호랑이와 산적이 자주 출몰했던 곳이다. 이에 보부상들이 무사안전을 위해 산령각을 지어 제를 지냈다고 한다. 산령각 옆에 있는 신목이 눈길을 끌었다. 성황목이나 신목으로는 소나무나 느티나무가 많은데, 이곳 신목은 음나무다. 음나무의 가시가 악귀를 쫒는 영험한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음나무는 거목이 되면 야생동물로부터 잎을 보호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가시가 사라진다.
주목군락지에는 또다른 신목이 있다. 괴괴하게 생긴 수령 600년 주목이다. 죽은 가지와 산 가지, 반쯤 고사하고 반쯤 살아있는 둥치. 마치 동화속에서나 봄직한 나무귀신 같았다.
태백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제단이다. 제일 먼저 만난 곳은 장군봉에 있는 장군단이었고, 조금 더 가서 태백산 영봉에서는 천황단을 만났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하단이 있다. 이 모두를 일컬어 천제단이라고 한다. 중심부에 있는 천황단에서는 하늘에, 장군단에서는 사람에, 하단에서는 땅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세 제단중 천황단이 규모면에서 제일크고, 모양면에서 위엄이 있고, 제일 단단한 검은 돌로 쌓여져 있다. 하단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부쇠봉과 만나는데, 이곳에서 백두대간이 낙동정맥과 소백정맥으로 나뉘어 진다. 다시 동쪽으로 가면 문수봉이 나온다. 문수봉은 무속인들이 기도를 마무리하는 곳으로 정상에는 3개의 커다란 돌탑이 세워져 있다.
태백산은 산 전체가 완만한 육산이다. 가파른 계곡이 없고, 뽀족 돌출된 바위도 없다. 이 일대는 20억년 전 선캄브리아대에 형성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형이고 매우 단단한 편마암 기반 암석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런 지질적 특성으로 매우 느리게 풍화되고 침식되어 태백산 특유의 산 모양을 갖게 되었다. 문수봉에서 천제단 능선을 바라보면 마치 접시를 엎어 놓은 것 처럼 보인다. 천제단 능선에 서면 시야에 막힘이 없고, 주위 산군들의 흐름은 첩첩 물결일듯 넘실넘실 태백산을 감싸고 있다. 태백산과 비슷한 산세를 가진 산으로는 소백산과 오대산이 있다. 두 산도 완만한 육산이며 정상부도 편편하다. 태백산이 단군을 모시는 천제단이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 신앙처가 되었고, 소백산과 오대산은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갖는 부처의 산이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옛 선인들은 왜 태백산을 영산이라 믿고 숭배하게 되었을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형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아니면 백두대간이 낙동정맥과 소백정맥으로 나뉘어 지는 중심점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옛 선인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달리 훨씬 뛰어난 영적인 능력 그리고 산천초목과 교감하는 능력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태백산 정상에 오른 옛 선인들은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의 중심이고 신령한 곳임을 신내림받듯 강렬하게 느꼈을 것이다.
태백산에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다양한 형태의 숲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일출을 보기 위해 캄캄한 밤에 오르거나 눈 덮힌 설경을 보기 위해 올랐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맑고 밝은날 산에 오르니 눈에 들어 왔다. 고맙게도 태백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나무 이름표를 달아 놨다. 신갈나무, 시닥나무, 피나무, 사스래나무 ....... 활엽 혼합림 숲을 지나 산 능선에 오르자 주목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얼마나 눈비와 찬바람을 견디고 살았는지 속은 썩어 텅비었는데도 늘푸름을 간직하고 굿굿하게 하늘향해 팔을 벌리고 있었다.
주목군락지를 지나 천제단 능선에 오르니 철쭉 군락지가 나타났다. 봄에 꽃을 피워야 하는 철쭉의 가지에서는 벌써 생명의 붉은 기운이 느껴졌다. 이곳은 태백산에서도 바람이 쎈 곳이라 높이 자라지 못하고 사람 키정도로 키를 낮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바리깡으로 스포츠 머리처럼 깍아 놓은 듯 했다. 5월 꽃이 피면 장관을 이뤄 태백산의 또다른 모습이 펼쳐질 것 같았다.
하단을 지나자 신갈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문수봉 못미처 사스래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신갈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 가나 볼 수 있는 나무인데, 이곳 신갈나무는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높이 자라지 못했지만 다양한 형태의 멋진 수형을 갖추고 있었다. 사스래나무는 흔히 목격되는 나무는 아니다. 백두산 북파 올라가는 도로 옆 숲이 온통 사스래나무이고, 한라산 북벽 백록담 정상부근에서도 볼 수 있다. 태백산에서 사스래나무 군락지를 보다니 신기하고 기뼜다. 재질이 그리 강하지 못한 나무가 바람 쎈 태백산 능선에서 자라다 보니 가지가 꺽이고 휘어져 만들어진 수형은 안스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산 아래로 내려와서 만나는 숲은 4,5십년전 사방사업으로 인공 조림된 일본잎갈나무 숲이다. 천제단 능선과는 달리 바람이 잦아든 산아래, 오랜 세월 퇴적된 토심 깊은 비옥한 땅에 심겨진 잎갈나무는 거침없이 키를 키워 천제단 능선 숲과는 전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마치 키 높이 경쟁을 하는 미녀 모델들 같았다.
겨울산에는 눈이 없어도 상고대가 앉지 않아도 아름답다. 잎이 무성한 여름산에서 느낄 수 없는 나목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 좋다. 태양을 흠모하고, 바람에 맞서고 순응해 만들어진 나무의 수형은 각양각색이다. 환경에 저항하고 순응한 생의 모습이며, 수많은 스토리를 전해주는 나무의 역사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아름답고 경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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