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 오후 5시, 1년 중 가장 춥다는 대한을 며칠 앞두고 부산 이기대로 갔다. 남쪽 부산이라지만 대한답게 날씨는 추웠다. 다행히 바람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오륙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스카이워크에는 젊은 남녀 연인 두 사람만이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멋진 포즈를 핸드폰 사진에 담고 있었다.
일몰 때와 일출 때, 이기대에서 보는 오륙도의 풍경은 어떨까.
남파랑길 여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일었던 호기심이었다. 해파랑길 출발점과 남파랑길 출발점은 똑같이 부산 이기대다. 지난번 해파랑길 트레킹은 정오쯤 출발했었는데, 남파랑길 트레킹은 좀 다르게 시작하고 싶었다. 이기대와 오륙도를 단순한 출발점으로만 삼을 것이 아니라 이곳의 아침과 저녁 풍광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해가 떨어지기까지는 아직 30분이 더 남았다.
오륙도를 거쳐 태종대까지 갔다 해운대로 돌아가는 마지막 유람선이 석양빛 붉게 물드는 바다를 미끄러지듯 지나고 있었다.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아쉽다기보단 아름답게 끝나는 하루를 대하고 보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석양은 부산항에 길고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다가 부산 구도심지로 내려온 산자락 끝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쪽 하늘에는 숨어 있던 둥근 보름달이 점점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려냈다. 운 좋게도 하늘이 맑아 일몰과 보름달을 함께 볼 수 있었다. 해가 남쪽방향에서 지는 이맘때가 일몰 풍경도 가장 좋을 듯했다. 참 좋은 날, 좋은 때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6시가 되자 스카이워크 관리자는 문 닫을 준비를 했다. 어쩔 수 없이 스카이워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부산의 야경은 어떨까, 궁금증이 일어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어스름 어둠이 내리자 부산항에 불빛이 들어오고, 반대편 해운대 고층빌딩 숲에도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인지 부산항과 해운대 고층빌딩 숲의 야경은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 7시, 숙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다시 이기대로 갔다. 해 뜨는 아침 오륙도의 모습은 보기 위해서였다. 미리 오륙도 일출 명소를 검색해 봤더니 신선대 아래쪽 테니스코트장에서 보는 일출이 좋다는 정보가 있었다. 하지만 어제 갔던 이기대로 또다시 갔다. 일출만 놓고 봤을 땐 신선대 쪽이 더 좋을지 몰라도 오륙도와 일출을 함께 느끼기에는 오륙도와 가장 가까운 이기대 쪽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선택은 잘한 것이었다. 이기대 주차장 아래 바닷가 갯바위에서 보는 일출은 아름다웠다. 오륙도 너머 먼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은 나의 남파랑길 여행을 축하하는 서광처럼 느껴졌다.
이기대에서 일몰과 일출을 봐야겠다는 욕심에서 불편한 하룻밤을 꼬박 지낸 셈이었다. 결과는 헛되지 않았지만 많은 시간을 남파랑길 출발점에서 보냈다. 남파랑길은 부산에서 전남 해남까지 장장 90개 코스에 1,470km, 동에서 서로 이어진 길이다. 쉽지 않은 코스지만 도전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벅차올랐다. 마침 따뜻한 아침햇살을 등 뒤로 느끼면서 걸으니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천주교 공동묘지를 지나고 벚나무 가로수 포장도로를 걸었다. 야트막한 바닷가 숲 안에 있는 신선대에 오르면 부산항을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갔는데 키 큰 나무들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신선대 부두에는 수출 한국의 물류 중심지답게 수많은 컨테이너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마침 눈에 띄는 음식점이 있어 들어갔다. 아침도 거른 채 걸었기에 시장끼가 돌았기도 했고, 추운 날씨에 몸도 녹이면서 쉬어 가고 싶었다. 그런데 메뉴판을 보니 달랑 선짓국 8,000원, 국수사리 1,000원만 쓰여 있었다. 좀 특이한 음식점이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숨은 맛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상대로 선짓국은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났다.
애완견과 함께 걷는 사람, 두터운 모자에 겨울 운동복 차림의 노부부 등등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바로 인근에 UN평화공원이 있었다. 공원 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짧은 도보 트랙을 바쁘게 걷고 있었다. 625 때 UN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군인들의 묘역이 시민들의 휴식공원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반전, 화해, 평화 등등을 이미지화 한 조각공원을 지나 추모공원으로 갔다. 참전국의 국기가 게양돼 있는 양지바른 곳에 전사자들의 묘역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반듯하게 각 잡고 전사자 옆을 지키고 있는 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절도와 결기가 느껴졌다. 잎을 떨구고 맨몸으로 굳세게 자리 잡고 있는 배롱나무, 단정하게 꾸미고 도열해 있는 향나무에서는 군인의 기백과 충성심이 느껴졌다.
문현 교차로를 지나 범일교를 건너자 길은 부산개항가도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육교를 건너니 바로 작은 산봉우리 숲이 나타났다. 숲아래 길옆에는 조선통신사역사관이 있었고, 통신사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가 열렸던 영가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당시 바닷가에 자리 잡은 영가대는 경치가 빼어나 시인묵객은 물론 이곳을 거쳐간 통신사 일행들이 많은 시를 남겼다고 했다. 영가대 뒤 봉우리 숲 정상에는 부산진성의 남문이었던 진남대가 있었다.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부산진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이 지역이 조선시대 일본과 영욕의 역사가 있었던 부산포였다. 조선 초기 무질서하게 거래되던 무역을 관리하기 위해 왜관을 설치했고, 왜구들의 침략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산진성을 쌓았다. 조선시대 부산포는 일본과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동남해안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제일 먼저 침략한 곳이 이곳이며, 임진왜란 후 양국 평화의 시대 통신사를 파견한 출발점도 이곳이었다.
부산진성을 한바퀴돌아 나오자 사거리 큰길 건너 부산진시장이 나타났다. 100년 이상 역사를 지닌 부산의 대표적 시장이었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통로는 한 사람 겨우 비켜지나갈 정도로 좁았고, 가게마다 온갖 상품들로 가득했다. 배낭을 메고 지나기가 민망하여 얼른 빠져나왔다. 시장 뒷골목으로 나오니 바로 음식점 골목이었다. 아침을 느지막하게 먹은 터라 시장끼는 없었으나, 호기심에 손님들로 붐비는 손칼국수 집에 들어갔다. 음식값은 5,000원 선불이었고,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경부선 철길 아래 지하도를 건너 골목길로 들어서니 부산포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유적들이 군데군데 나타났다. 제일 먼저 만난 곳은 정공단,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였던 부산진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장열하게 순국한 정발 장군과 그와 함께 목숨을 바친 분들을 모신 사당이었다. 특이게도 정발장군의 애첩인 애향을 기린 비가 세워져 있었다. 주변에는 부산진교회, 일신여학교, 부산포개항문회관 등이 있었다. 부산진교회는 초량교회와 함께 개항 초기 부산지역 기독교 전파의 산실 역할을 한 곳이며, 일신여학교는 부산 경남지역 최초의 신여성 교육기관으로 부산지역에서 3.1 독립운동의 깃발을 맨 처음 올린 곳이었다.
부산포개항도로에서 가파르고 긴 계단길을 힘겹게 올라가니 산복도로로 이어졌다. 두 곳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산 아랫동네와 산 윗동네 같은 느낌이었다. 가파른 계단길, 좁은 골목길, 허술한 집 구조 그리고 동네의 모습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났다. 개항 초기 비교적 평탄한 바닷가 중심으로 형성됐던 부산포는 그 후 급격한 유입인구 증가로 산비탈 위쪽까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산복도로 주변의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부산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두 차례였다고 한다. 일제 말 35만 명 정도 살았던 부산은 광복 후 귀환동포 20만 명, 한국전쟁 때 피난민 50만 명이 몰려들어 100만 명이 넘는 도시로 갑자기 팽창하였다. 인구는 포화상태를 넘어섰고, 집이 없어 살 곳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포구 주변 동네를 벗어나 산비탈에서라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도시계획이란 있을 수 없었고, 한 집 두 집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 지금과 같은 산복도로 주변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산복도로는 도로명 주소제도가 도입되면서 망양로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망양로에서 보는 부산항은 아름다웠다. 부산에서 경관이 가장 좋은 곳이 이곳이 아닌가 싶었다. 최근 해운대가 새로운 신흥 주거지역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이곳도 경관과 입지여건면에서는 뒤처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망양로 주변은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 사람 살기에 너무 불편해 보였다. 개발이 멈춰 섰고, 여건상 개발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교통도 불편하고, 편의시설도 부족하고..... 마트는 눈에 띄지 않고 식료품을 파는 이동 트럭이 마트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부동산 중개업소마저 없어서인지 주민 자율게시판에는 부동산 급매 광고가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한 때 이 지역은 부산에서 가장 번성했던 곳 중 하나였다. 바로 아래 국제 무역의 중심인 부산항이 있으며, 또한 경부선 철도의 출발역인 부산역이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물류,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인구는 계속 감소하여 한 때 부산의 명문으로 이름났던 학교들은 취학인구 감소로 학교의 유지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망양로, 산복도로는 구봉산 중턱 허리에 평탄하게 이어졌다. 바닷 쪽으로 높은 건물이 없어 부산항과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걸을 수 있었다. 단지 가로수가 거의 없어 햇볕을 피할 수 없었지만, 여름이 아닌 겨울엔 오히려 걷기에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파랑길은 초랑 이바구공작소에서 이바구길로 통해 부산역 쪽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내려가지 않고 망양로로 계속 걸어 부산민주공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부산의 역사적 유적이 많고 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개항가도와 망양로에 간 김에 우리나라 민주화 진전에 중요한 역할 한 1979년 부산민주항쟁 기념관도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초랑이바구길로 되돌아왔다. 길이 1.5km 초랑 이야기길은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테마거리였다. 이곳은 부산항 개항 때부터 피난민 시절 그리고 산업화 시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야기 창고였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168개 계단이었다. 지금은 모노레일이 설치돼 있지만 가파른 경사도의 계단은 보기만 해도 힘들고 아찔했다. 그 계단을 걸어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 사람들의 숱한 애환과 얘기들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듯했다.
남파랑길 1코스 트레킹은 초랑 차이나타운을 지나고, 텍사스거리를 지나 부산역에서 끝났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갔다 온 느낌이었다. 부산 친구들로부터 들었던 어릴 적 그들의 얘기들이 박제되어 보존돼 있는 듯했다. 산복도로는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들의 추억 속 고향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파랑길 1코스(21.2km)
<이기대(석식,박) - 신선대 - UN평화공원(조식) - 조선통신사역사관 - 부산진시장(중식) - 부산진교회 - 망양로 - 이바구공작소 - 민주공원 - 이바구공작소 - 이바구길 - 초량차이나타운 - 텍사스골목 - 부산역 - (지하철) - 중앙역(석식,박)>
1.17일 17시-18시, 1.18일 07시-17시 (총 11시간)
*비스듬 지명 : 남파랑길 벗어난 곳(이하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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