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음력 6월 26일은 어머니 생신이다. 이 날은 우리 형제들 그리고 조카들이 고향 어머니 댁으로 모여 적막하던 시골집이 모처럼 사람소리로 시끌벅적해 진다. 어머니는 손자들을 위해 마당 텃밭에 강냉이를 심어 두고, 또 떠나는 아들에게 줄 쌀 한 포대, 감자 한 자루, 마늘 조금, 들깻잎, 고구마 줄기 등등 준비하신다. 그리고 여름 보신하라고 키우던 여 닐곱 마리 토종닭 중 아들에게는 암닭을, 딸에게는 수탉을 손수 잡아 이웃집에서 얻은 대추 한 움큼, 밤 한움큼과 함께 실어 주신다. 아직도 어머니께 드리는 것보다 받아 오는 것이 더 많다.
어머니는 올해 88세 미수이며 동네에서 제일 어른이시다. 3남2여 자식들집에 편안하게 지낼 수 없는 것도 아닌데 8년 전 아버지가 먼저 가신 후부터 더 고향 집을 떠나려 하지 않으신다. 말씀인즉 도시생활이 갑갑해서라고 하시지만 기실은 자식들에게 부담주기 싫고 한 서린 고향 집에 대한 애착에서 일 것이다.
어머니는 열 여섯에 열 여덟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초혼이 아닌 재혼이었다. 외갓집에서는 사주단자를 받기 직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 성격이 완고하셨던 외할아버지는 사주단자를 문안으로 들여 놓지 못하게 했고, 중신아비는 빗자루 몽당이로 쫒겨났다. 하지만 혼약은 이미 맺은 것이고 소문은 날대로 나버린 것. 파혼은 팔자 센 여자의 낙인으로 인식되던 시절인 만큼 사주단자를 되돌려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몰려드는 구경꾼이 창피하기도 해 어머니는 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외할아버지를 설득해 결혼을 받아들였다. 당찬 어머니의 한 모습이었다.
독자였던 아버지는 열 네 살에 처음 결혼 하셨다. 열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그해 여섯 살 많은 새 어머니를 맞이한 아버지는 '어머니' 라는 말이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몰락한 선비의 무남독녀였던 할머니는 가정형편 상 스무 살이나 많은 할아버지께 재처로 시집 오셨다. 당시로는 상당한 수준의 학식을 갖췄고 성격이 아주 깐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일찍 대를 잇고 싶고 아들이 마음잡고 집안일에 충실하도록 하기 위해 일찍 며느리를 맞아 들였지만, 어린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제 역할 못하는 어린 남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어느 날 집을 나가고 말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시집살이도 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무관심과 바깥으로 겉돌기는 여전했고,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도를 더 해갔다고 한다. 당대에 들어 노름으로 이미 기울어진 가세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씀씀이는 여전했고 음식 수발, 술 수발 뒷감당이 버거웠다고 한다. 신혼 살림을 꾸몄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정을 느끼지 못했고 따뜻한 말 한마디 서로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하던 결혼 1년 째 되던 날 아버지는 어머니를 친정에 데려다 주고 일본으로 훌쩍 떠나버렸다고 한다.
혼자 남게 된 어머니는 집안일 뿐만 아니라 농사일까지 도맡아 해야만 했다. 노름에 빠진 할아버지는 집안일은 관심 밖이었고, 빚만 알게 모르게 늘어갔다. 할머니는 언제나 풀 먹인 한복을 입고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고 한다. 해가 갈수록 어머니의 시집살이만 더해 가기만 했다. 야속했지만 1년마다 찾아오는 남편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고, 송금해 온 돈으로 할아버지가 남긴 노름 빚 갚고 살림도 그럭저럭 꾸러 나갔다.
한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으로 십 수년을 보낸 일제 말 어느 날, 일본에서 돌아온 이웃사람으로부터 아버지가 일본에서 딴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아들 셋을 데리고 무작정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토목회사 인부로 일하던 아버지는 그 당시 경력과 기술을 인정받아 작업반장이 되었고, 수입도 그런 대로 괜찮았다. 아마 그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부부의 정이 쌓였던 것 같다. 아들 셋을 데리고 온 아내. 남편없는 가운데 시부모를 모시고 집안을 지킨 조강지처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였을까?
그러나 일본 생활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패전의 기색이 짙었던 일본은 징집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아버지도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단신이었을 때와는 달리 가족을 데리고 징집을 피해 이사를 다닌다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일본에 계셨던 20개월 동안 세 번을 옮겼다고 한다. 우리가족은 노도반도에 있는 와구라에서 일본의 패전과 조국의 독립소식을 들었다. 일본에 남을 것인가, 귀국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인근에 사는 조선인 가족 살해 소식을 듣고 놀라 거의 맨몸으로 귀향선을 구해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일본인과 노파가 살고 있는 적산가옥을 배정 받았지만 일본에서 받은 충격이 컸고, 또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본과 가까운 부산이 싫어 지금 살고 있는 하동으로 가 정착했다.
아버지 고향은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석천부락이다. 그 곳은 윤씨 동족부락인데 조선 중기 낙향하여 일가를 이룬 합천 구평에서 떨어져 나와 부락을 형성했다. 석천은 의령 자골산 자락에 싸여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자리라고들 하지만 산골부락으로, 어머니의 과장된 말씀을 빌리면 골짜기 너무 좁아 옛날에 토끼가 동네 앞산과 뒷산을 뛰어 건넜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산골짜기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며, 어머니 또한 시집살이에 고생한 기억뿐인 그 곳이 싫었던가 보다.
지금 어머니가 계신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톡골부락, 해방 전에 석천을 떠나 이 곳으로 이주한 친척집을 방문한 아버지께 이 곳은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탁 트인 들이 좋았고, 무엇보다 마을 앞에 개울이 있고 옆으로 강이 흘려시조 탄생설화부터 유달리 잉어와 인연이 깊은 우리 윤씨집안이 번성할 터라는 지리적인 조건에서 였다.
톡골부락은 지리산 중산리와 대원사 계곡에서 발원하는 덕천강이 유속이 느려지면서 만들어진 평야지대에 형성된 부락이다. 들은 퇴적층으로 비옥하고 수리가 용이하여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어귀에 남아 있는 고인돌을 보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뒤쪽에는 고성당산이 있는데 동학농민전쟁 때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첫 싸움이 이곳에 있었다. 그 당시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대항하여 덕석을 짤라 갑옷처럼 입고 싸웠지만 역부족으로 수많은 장정들이 죽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최근들어 그 역사적 사실이 인정되어 건립된 위령탑이 비명에 간 무명 농민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마을 앞쪽엔 야트막한 안산이 용머리모양으로 2백여호 마을을 감싼 형태를 하고 있어 동네에 들어서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멀리 북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굽어 보고 있으며, 남강의 지류인 덕천강이 들녘 가운데를 흐르고 있다. 조선 선조때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처사이시며 실천 유학의 대가이신 남명 조식 선생은 만년에 이곳 덕천강 상류 산천재에서 학문을 가르쳤으며,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선생의 뜻을 따라 임진왜란때 의병운동에 앞장섰다. 또 우리나라 유학의 사표인 정몽주 선생의 사당이 인근 부락에 모셔져 있다. 이 지역은 자연히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했으며, 외지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기 힘든 곳이었다. 이 곳에 이주한 우리 일가는 비록 잔반의 후예이기는 했지만 한학교육을 받았기에 무시당하지는 않았고, 뛰어나 교육열로 짧은 기간내에 주목받는 성씨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곳에서 가난, 좌절, 병마의 고통을 겪으시게 된다.
농사일을 별로 해본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일이 서툴러 차라리 어머니가 대신하거나 일꾼을 사서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어릴 때 기억에도 아버지는 물꼬괭이, 부채를 들고 휙 들을 둘러보고 주막집이나 그늘에서 쉬고 계시는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남처럼 소출을 낼 수 없어 추수가 끝나면 알곡뿐만 아니라 쭉정이까지 까붐질하여 공출내고 짚단만 덩그러니 남은 마당을 바라봐야만 했었다. 이전에도 생활이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보내주신 돈으로 먹는 것은 그럭저럭 꾸려 나갔었는데, 당장의 끼니가 걱정이었다. 알곡은 엄두에 낼 수가 없었고 사십리길 진주장에 나가 등겨를 구해 죽을 쑤어 연명했었다. 논을 사고 남는 돈으로 겨우 구한 두칸 오두막집은 궁상스럽기 그지없었고 가끔가끔 흉물스런 구렁이마저 자주 나타나 어머니의 혼을 빼놓곤 했다고 한다. 도저히 정이 들지 않은 집이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빚을 내 큰집으로 이사하는 어머니를 집안 망칠 여자라 야단쳤지만 아버지는 결국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까지 도맡은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새집은 동네 맨아랫쪽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데 앞산 용의 눈과 마주하는 곳으로 집터가 좋아 당시 시세보다 비싸게 샀다. 이사후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자식들 끝이 잘 풀린 것은 집터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자기에게 팔라고 은근히 다짐을 받으려 한다고 한다.
이사로 진 빚은 생활에 큰 짐이 되었다. 엄청난 고율이었던 사채를 하루라도 빨리 갚기 위해서 어머니는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하셨다. 특히, 길쌈에 손재주가 있었던 어머니는 겨울부터 봄까지는 무명베,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삼베 짜기에 매달렸다. 직접 거둔 목화나 삼뿐만 아니라 이웃집 베까지 힘 닿는 대로 받아 짰다고 한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어머니는 밤을 베틀에서 꼬박 새우고 아침준비를 하신적이 많았다. 긴긴 겨울밤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일어난 나는 주무시지 않고 물레를 돌리시는 어머니를 종종 보면서 자랐다. 여름에는 타닥타닥 삼 가르는 소리, 겨울에는 위잉위잉 무명실 켜는 물레소리가 자장가였다.
목화밭이 사라진 지 오래고 중국에서 값싼 삼베가 들어와 동네에서 베 짜는 집이 사라졌지만 어머니는 얼마전까지 삼베를 짜서 자식들, 손자들 여름 홑이불감으로 보내 주시어 시원하게 여름을 나고 있다. 일을 손에 놓지 않고 사셨던 어머니는 쉬면은 오히려 몸이 아파 편히 쉴 수가 없으시다. 그러니 자식네 집에 오시면 오히려 병이 나 오래 있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 지금도 여름 휴가때 고향집에 가면 우리더러는 낯잠 한숨 자라고 하시면서 자신은 버릇된다고 주무시지 않는다.
옥종 5일장은 십리가 좀 더 되는 거리에 있다. 장날이면 돈 되는 것을 모아 내다 팔았다. 베, 삼, 무, 배추, 솎은 채소, 호박잎, 고추, 고구마 줄기... 장이 서는 전날 밤늦게까지 팔 물건을 준비해 두었다가, 새벽같이 아침 밥도 뜨는 둥 마는 둥 광주리에 물건을 이고 가 쇠전 옆 노점에서 점심도 거른 채 손님을 기다리다 재수 좋으면 오후장에 떨이하고, 그렇지 않으면 파장무렵 가게집에 넘기고 돌아오곤 하셨다. 이렇듯 발버둥 쳤지만 가난은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우리 형제는 3남2여이다. 어머니는 8남매를 낳으셨는데 그중 첫째 셋째 다섯째 아들을 잃었다. 아들 둘은 다 키워 중고등학생일 때, 하나는 네살 때 잃었다. 집은 가난했지만 자식들 교육에는 열의가 강했던 부모님은 다는 못 시켜도 큰 아들과 셋째 아들은 공부를 시켰다.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살아남은 형제들에 비해 영리했고 체격도 좋았던 것 같다. 특히 셋째 아들에 대한 애석함은 크다. 어려운 살림살이중에 당시 농고에 다녔던 셋째 아들이 기둥처럼 느껴졌는가 보다. 더욱 원통해 하는 것은 지금은 손쉽게 고칠 수 있는 편도선염에 돈이 없어 손도 못쓰고 잃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돈벌이로 지리산 중턱에 있는 목기장에 들어 갔었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 자식의 죽음을 감당해야만 했었다. 훗날 꿈을 펴지 못하고 먼저 간 셋째 아들에게 영혼 결혼식을 올려 주었다.
우리 형제는 나이터울이 다섯 살 씩으로 많은 편이다. 세형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지금의 큰 형님은 나보다 스무 살 위로 모르는 사람들은 부자지간으로 오해한다. 어머니는 공부를 시키지 못하고 집에서 일만 시킨 두 형과 두 누나에 대해 항상 미안한 생각을 갖고 계신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학력의 설움을 많이 겪었고 가끔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기반을 잡고 사는 자식들을 고맙게 생각하신다.
나는 아버지 마흔 일곱, 어머니 마흔 다섯에 늦둥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셋째 형이 돌아가셨다. 큰 형도 이미 장가를 가 첫 아기를 출산한 후였다. 동네사람 보기 부끄럽기도 해 유산을 시키려고 무던히 애 썼다고 한다. 놋그릇 닦는 수세미를 삶아 먹으면 떨어진다는 속설을 듣고 오래된 수세미를 구해 삶아 먹었다고 한다. 참으로 위험 천만한 일이었다. 중금속에 오염되지 않고 오래 사시는 어머니와 건강한 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난 어릴 때부터 가까운 친척이 많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버지가 독자였기 때문에 사촌형제들이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외갓집이 없다는 것이 외롭고 슬프게 했다. 친구들로부터 외할머니의 사랑, 외가집에서의 추억담 이야기를 들을 때면 컴플렉스마저 느꼈다. 하지만 친정이 없는 어머니, 대가 끊기는 것을 보고도 어쩔 수 없었던 어머니의 한숨 앞에서는 조금도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외가집의 대가 끊긴 것은 외할아버지의 완고함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독자였던 남동생은 애지중지 자랐고 친척들로부터도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느날 외가집을 방문한 친척이 준 동전을 갖고 놀다가 그만 삼키고 말았는데 불행히 식도에 걸리고 말았다. 병원에 가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지만, '신체발부 수지부모' 를 굳게 믿었던 외할아버지는 수술을 하고 죽으나 그냥 죽으나 마찬가지라 하시면서 수술을 거부했고, 시름시름 앓다가 1년만에 죽었다고 한다.
그 뒤 술과 한숨속에 사시다 양자도 들여놓지 못하고 외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가까운 친척마저 없었으며, 여자 몸으로 더구나 시집간 출가외인으로 양자를 구한다는 것도 어려워 겨우 친척에게 산소관리와 제사 부탁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오갈 데 없이 고아가 된 여동생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지만 시어머니의 눈총은 피할 수 없었고, 친정이 없어진 것도 한이 맺히는데 눈치밥과 구박속에 천덕구리로 사는 단하나 혈육 여동생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나에게 외갓집이 없다는 것보다 어머니에게 친정이 없다는 것이 더 깊고 깊은 슬픔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한맺힌 친정 생각을 반추하시지만 산소를 관리하던 친척마저 소식이 끊겨 산소마저 찾아 뵐 수도 없게 되었으니... 오히려 덤덤해지신 것 같다. 어쩌면 어머니는 더 강인하게 되셨는지도 모르겠다.
60년대 들어 우리집은 경제적으로 조금씩 여유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터득한 토목기술을 인정받아 농한기에 도로확장, 경지정리 공사장의 작업 감독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형들은 군에서 익힌 공병기술과 눈대중으로 배운 집짓는 기술을 밑천으로 목수 일자리를 맡아 살림에 도움을 주었다. 하동으로 이사온지 십수년만에 생활의 여유를 좀 찾게 된 것이다. 하지만 행복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어머니는 이상한 병에 걸렸다. 당시 이웃사람들은 신이 들었다고 했다. 멀쩡하게 계시다가 갑자기 온 몸을 사시나무 가지 떨듯 떨었다. 그럴 때면 장정 몇명이 잡아도 멈출 수가 없었고, 견디다 못해 기둥을 잡으면 기둥마저 흔들렸다. 어머니는 친척 할머니 장례 때 신끼가 있던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던 죽은 딸 인형 담은 광주리를 태워 귀신이 붙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마 어머니의 쌓인 한이 병이 되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병명을 알 수 없으니 약으로 다스릴 수도 없었다. 마을 뒤 고성당산에 있는 약천사 절, 면소재지에 있는 찬물교 도장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약천사에서는 귀신을 내 쫓는다고 동쪽으로 뻗은 실한 복숭아 가지로 때려 어머니의 온몸에 피멍만 들었다. 찬물도장에서는 불을 전혀 쓰지 않고, 냉방에서 찬음식만 먹으며 치료를 받았지만 정성이 부족해서 인지 또다른 병만 얻고 돌아왔다. 이것저것 조금씩은 아셨던 아버지의 처방에 따라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정수리에 불붙은 쑥 묶음을 뜸질용으로 이고 다녔고, 소태나무를 캐다 삶아 드셨다. 지금도 그 때 뜸질 흉터가 머리위에 남아 있으며, 쓰디쓴 소태 삶은 물을 너무 많이 마셔 쓴맛을 알지 못한다.
해가 바뀌어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런 저런 방법을 써 보았지만 돈만 허비하는 결과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때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하지 않던 굿을 하기 시작했다. 한달이 멀다 하고 집으로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였다. 귀신을 부르는 초혼 소리, 들기에도 무거운 대나무 신대를 잡고 뛰는 어머니, 귀신을 쫓는 다고 내던지는 시퍼런 칼, 무당의 귀신 목소리 그리고 신명나게 방울을 흔들면서 추는 무당의 뒷풀이춤 등등... 영검이 있었던지 병을 앓은 지 3년째 되던 초등학교 6학년때 어머니는 씻은듯이 병이 나았다. 어린시절 학교갈 때와 잠잘 때 외에는 어머니에게 거의 붙어 살았던 나에게 어머니의 병은 엄청난 무게로 가슴속에 자리 잡았고, 그 후 나의 성격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속에 자랐다. 세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막내인 나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신 것 같다. 그것이 나의 자립심을 약하게 했고 늦게 까지 어머니 치맛자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 것 간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그때부터 어머니 곁을 떠나 살게 된 셈이다.
늘 어머니는 내가 군에 갔다 오는 것을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셨다. 병으로 오랜 고생을 한 어머니는 내가 장성할 때 까지 못 살 것으로 생각 하신 것 같다. 어린 나를 모고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토요일 오후 시골집으로 갔다 진주로 돌아갈 때면 덕천강 나룻터에서 내가 모퉁이를 돌아 뵈지 않을 때 까지 서 계셨다. 나도 그때 무척 눈물을 많이 흘렸다. 어느날 어머니는 하숙비로 쌀 20되를 머리에 이고 학교로 찾아 오신 적이 있는데, 나는 눈물이 쏟아져 어머니 앞에 설 수 없어 운동장을 몇 바퀴 돈 적이 있다.
내가 군에 갔다오고,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아 큰 손자는 중학교에 작은 손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지금까지 정정하게 사시는 어머니. 이제 어머니의 바램은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삶을 사시는 것이며, 자식들로부터 탈없이 잘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면 반가워 하시며 "전화해줘서 고맙다" 라고 하신다. (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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