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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광장

궁하면 통한다

궁하면 통한다

 

 

53, 아침부터 제법 세차게 비가 내렸다. 반가운 봄비였다. 특히 오늘 오후 지역본부 앞에서 열리는 전농노 투쟁결의대회가 이 비로 조합원 참여도가 낮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은근히 고마웠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자 농성 선발대가 도착했고, 선전차량 엠프에서는 운동권 가요와 선전방송이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려댔다. 학창시절 눈시울 붉히며 불렸던 노래들인데, 이젠 듣기조차 싫었다.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대구, 경북지역에서 버스를 대절해 온 노조원들이 창원시지부에 난입하여 객장 기물을 파손하고, 전표를 집어 던지는 난동을 부렸다는 연락이 왔다. 무소불위, 무법노조다. 이 소식을 들은 중앙회 직원들이 흥분했다. 노조의 이런 비이성적 행위는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묵과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사태였다.

 

어떻게든지 투쟁대회를 고조시켜 중앙회를 압박하고 언론의 관심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일차 목표였다. 행사일자도 남북노동자대회가 끝나는 다음날로 했고, 장소도 남북노동자대회가 개최된 창원으로 한 것이었다.

 

대회의 성패 여부에 따라 전농노의 투쟁 수위도 달라지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행사였다. 민노총의 지원을 받고 전농노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가 총 출동하는 전국대회다. 그러기에 전농노는 대회 성공을 위해 어떻게든지 조합원들의 참석을 높이기 위해 조직력을 총동원했다. 그들은 6백명이상 참석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비가 온 덕분인지, 바쁜 영농철을 앞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덕분이지, 우리의 설득에 귀 기울였음인지 한 2백명쯤 참석했다. 아쉬운대로 안도가 됐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멀리 제주도에서도 참석했다. 경남지역에서는 하동과 거제 지역에 많이 참석했고, 전농노 회원이 아닌 산청농협에서 다수 참석한 것이 의아스러웠다. 창원지역 노동 현장 방문중인 민주노총 위원장, 사무금융연맹 위원장 참석하여 연대사를 하였다.   

 

이들은 한미 FTA반대, 시군금고 수익환원, 회장 퇴진에 덧 붙여 지역본부장 퇴진을 외쳤다. 날 계란을 던지고, 건물 내 진입을 시도했다. 다행히 경찰 2개 중대가 투입되어 이들을 막아 줬다. 노조원들의 근로조건 개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런 정치투쟁을 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지.

 

오후 2시에 시작된 집회는 도청앞까지 가두 행진을 한 후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끝났다. 전농노가 지역본부를 점거하고 전국단위 시위까지 하게 되자 지역본부 직원들의 불만은 높아 갔다. 왜 빨리 해결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여기저기서 우회적으로 들리기 시작했고, 중앙본부에 대한 불만도 커져 갔다. 이러다가는 연말 시군금고 계약에 큰 차질이 불가피 하다는 둥, 왜 중앙회를 대신해서 지역본부가 전농노와 대리전을 치르느냐 등 등. 급기야 협상 팀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도 제기되기 시작했다.       전농노 대응방법에는 두가지 기류가 있었다. 하나는 전농노와 대치 상태를 경남에서 좀 더 유지해야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협상을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협상 당사자로서 참으로 난감했고 답답했다.   설상가상으로 협상 중재 역할을 맡았던 경찰인사가 미국에 있는 딸을 만나기 위해 휴가를 냈다.       이런 관계로 협상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우리는 어떤 협상 의견도 내기 곤란한 지경있었고, 전농노는 512일 가족들이 참여하는 투쟁 결의대회 준비에 바빴다.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양쪽 모두 스스로 게임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전농노는 사퇴한 본부장을 대행하는 부본부장도 사퇴의사를 표한 상태였고, 우리 또한 협상과 대치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변화의 조짐은 전농노 쪽에서 먼저 감지되었다. 59일 지역본부앞에서 진행된 운영위원들의 출정 다짐 대회에서 사무국장은 노조원들이 참여하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열심히 독려하자는 당부를 했다. 전농노도 계속된 투쟁에 지치고 있었던 것이며, 노조원들은 명분없는 투쟁에 회의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510일부터 경찰쪽에서도 협상 중재에 나섰다. 조짐대로 전농노는 협상에 적극적이었고, 협상결과에 따라 512일 집회수위까지 조절하겠다고 했다. 언론쪽에서도 "싸울 일도 아니구먼. 힘 뒀다가 농촌에 가서 쓰지"하는 부정적인 투로 협상에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협상에 대한 입장 정리가 안된 상태였다. 노사관계에 있지 않은 전농노를 협상 파트너로 인정해 주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도 경남에서 전농노와의 대치국면을 좀 더 끌어 달라는 본부쪽의 비공식적 메세지가 발목을 잡았다.

  

지난 53일 점거농성 때 협상안 보다 한참 후퇴한 안을 실무진에서 내 놓고 전농노와 줄다리기를 했지만 정작 우리 내부의 의견 조율도 못하고 하루를 넘겼다. 다음날 지역여론과 직원들의 불만을 고려하여 협상을 해야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만약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농협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으며, 협상 결렬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피차 결정권이 없는 실무자들이기에 결정을 내리지 못해 밤 12시 넘게까지 신경전만 벌이고 협상안을 도출하지 못했다.

 

512일 오전 일찍부터 지역본부 정문 앞에 방송시설이 설치되고, 무대가 만들어지고 검은 만장까지 걸렸다. 오후 2시가 가까워 오자 대형버스가 도착했다. 일부는 가족까지 대동했다. 지역본부는 휴일 근무직원만 배치하고, 총무팀과 회원지원팀만 출근했다. 당직자만 근무하는 휴일날 무모하게 무단침입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으며, 만일 침입하면 법적인 절차를 취하기로 했다.

 

결국 512일 오전까지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농노에서 막판에 협상 요청이 들어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실무자에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집회 시작 직전에 협상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급히 2층 대강단에 간이 협상 테이블을 만들고, 합의문안 작성토록 했다. 전농노측에서는 본부장 직무대행, 부본부장 2, 사무국장 총 4명이 참석하고 우리측에서는 나, 팀장과 담당과장이 참석했다.

 

협상내용은 "최근 일어난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향후 이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번 사태와 관련 모든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협상내용은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 합의 내용이 공개되는 것은 우리쪽에서는 전농노를 협상 파트너로 인정해줬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웠고, 전농노는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본부에는 협상을 했다는 내용을 보고하지 않았다.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것에 대해 반대의견이 많았으나, 경찰쪽에서 고소고발과 관계 없이 인지 수사를 철저히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고소고발 건은 향후 전농노의 활동 추이에 봐가며 적절하게 쓸 수 있는 카드로 남겨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어 협상에 응하기로 했다.

 

합의문에 서명을 하고 나니 홀가분하다는 느낌보다 허탈했다. 2월부터 치열하게 기싸움을 해왔던 결과 치고는 너무 싱거웠다. 양측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동안 전농노는 노조본부장이 사퇴했고 4개 조합 분회가 전농노에서 탈퇴하였으며, 우리는 조직의 힘을 사업 추진에 쏟지 못하고 전농노 대응에 급급하였고 무엇보다 농협 전체의 공신력이 크게 실추 되었다.        

 

이번 협상은 우리나 전농노 양쪽 모두 본부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성사되었다. 그렇기에 내용도 없는 협상이었지만, 공개하기 곤란했었고 비공개하기로 한 합의문은 양측 모두에게 실리와 명분을 주는 묘책이었다. 이나마 협상에 성공할 수 있어던 것은 양쪽 모두 더 이상 지역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자해행위나 다름없는 투쟁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궁해야 통하는 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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