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아니고 길입니다
"오로지 소설로만 읽어야 한다" 김훈은 장편소설 '남한산성'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읽혀 지지 않았다.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척화를 할 것인가, 화친을 할 것인가, 격론을 벌이고 있는 최명길과 김상현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부딪힐 수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상 최명길과 김상현 만큼 극명하게 대립되는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나라(왕조)를 위한 충정은 다르지 않건만 나라의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전혀 달랐다.
청나라가 일어나고 명나라가 쇠퇴하는 동북아시아의 세력판도가 바뀌는 17세기, 실리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조선은 명분외교로 회귀했다. 새로운 강자를 무시한 친명배금 외교노선의 선택은 전쟁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실리를 택할 것인가, 명분을 지킬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쉽지 않은 결단일 것이다.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쓰고, 김상현은 통곡하면서 이를 찢어 버렸다. 최명길의 주화론은 청의 칩입에 대한 대응책은 강화와 싸움 두가지 뿐인데 싸우자니 힘이 미치지 못하고, 화의를 늦추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함락되면 위아래 가릴 것없이 짓밟힐 수 밖에 없으므로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 김상현의 척화론은 명을 배신하고 청에 항복하는 것은 예의와 삼강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주장이었다.
최명길의 주장은 현실적이었고 옳았다. 비록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지만 왕조를 지킬 수 있었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행적은 조선 후기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옳게 평가받지 못했다. 대신 김상현의 척화론은 전란이 끝난 후 더 큰 힘을 발휘하였다. 뒤를 이은 반청론과 북벌론은 무너진 양반 지배층의 자존심을 세우는 이념이 되었고 사회를 통제하는 논리가 되었다.
소설의 흐름은 지루했다. 좁은 남한산성에 갇혀 뾰족한 대응책 하나 세우지 못하는 무능한 조선 왕조의 모습 같이 답답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였고, 일상인 것 같았다. 말이 난무하고 결단은 더디고, 말이 앞서고 실행은 뒤 따르지 않았다. 화친도 척화도 아닌 책임 회피성 말만 하는 재상의 언행은 요즘 유행하는 코메디 "같기道"를 보는 것 같았다. 항복문서를 쓰라는 왕의 하명을 받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꾀를 내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 모습은 서글프고 안타까웠다.
김상현은 살기 위해서는 항복문서를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최명길은 항복문서는 글이 아니고 길이라고 했다. 명분이 없는 삶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김상현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선택의 길목에서 다수를 차지하곤 한다. 명분은 쭉 그러해 온 것이기에 공감을 얻기 쉽고, 화친은 처음 가는 길이기에 여론의 지지를 얻기 힘 들기 때문일 것이다.
병자호란이후에도 조선은 근 300년을 이어왔다. 그리고 명분중시의 유교사상은 더욱 굳건히 뿌리를 내려 조선 후기 사회를 지탱하는 중심사상이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무너지는 양반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바로 삼강오륜을 바탕으로 한 유교사상의 강화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척화를 주장한 김상현은 유림사회의 중심으로 우뚝 섰고 그의 가문은 조선의 명문 가문이 되었다.
조선 후기 쇄국정치도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정치 이념에 따른 것이었고, 세계화의 한복판에 들어선 지금도 명분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주변에는, 내 안에는 최명길과 김상현이 여전히 힘 겨루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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