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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광장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말은 간단해도 실행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전쟁에는 승패가 갈리는 법. 이기는 편이 있으면 반드시 지는 편이 있다. 패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다들 승리하기 위해 훈련하고, 상대방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을 짜지만 그렇다고 다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없는 무덤이 없듯이 지는 싸움에는 그 원인이 있다. 자신의 전투력을 과신했다든지, 상대방의 전투력을 과소평가 했다든지 아니면 여론을 등에 업지 못했을 때도 싸움에는 지게 마련이다. 내부의 분열도 패전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2월초부터 전농노와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 왔다. 내부 결속을 다지고, 명분을 쌓기 위해 교섭상대도 아닌 중앙회를 계속 공격하고 회장님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들의 주장은 신경분리, 시군지부 해체 등 들어줄 수 없는 억지였으며, 정식채널을 통해 교섭을 할 수 없는 상대였기에 뾰족한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노조간부 소속 3개 조합에 대한 무이자 지원자금 회수라는 강공책을 썼다. 작년부터 논의됐으나 후폭풍이 우려돼 실행을 미뤄 왔었는데, 전농노의 주장이 갈수록 과격해지자 급기야 자금회수라는 칼을 빼든 것이다. 제재수단이 없는 노조간부들에 대한 궁여지책으로 소속조합에 패널티를 물은 것이다. 타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은 이 상황에 돌파구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자금회수 후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오십보 백보라는 판단이 섰다.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전농노측에서 다음날 면담요청이 왔다. 그들의 주장은 무조건 자금회수조치를 철회해달라는 것이었고, 부당한 노조활동을 중단하면 철회하겠다는 우리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국 결렬되었다. 헤어질 때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텐데 악수라도 하자고 하니 노조 본부장은 엉겁결에 손을 내밀었지만 사무국장은 차갑게 돌아섰다. 첫 만남은 결렬됐지만 노조측에서 반응을 해 왔다는 점에서 자금회수의 효과는 나타난 셈이었다.

 

나는 낙관주의자는 아니지만 이번 싸움은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우세했다. 이유는 전농노는 계속 대응을 해야 하고 우리는 무대응이 가장 강력한 대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농노의 조직 동원 능력을 감안할 때 그들이 자금회수라는 초강경 조치에 맞서 지속적인 대응은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단지 우리쪽에서 얼마나 끈기있게 참고 기다려 주는가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했다.

 

합병을 앞 둔 도산농협에서 임직원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노조 간부를 불려 '당신 때문에 합병을 못하게 되면 직원들 다 그만 둬야 하는데 책임 질 수 있겠는가'라고 다그쳤다. 우리가 바라던 바다. 조합 임직원 스스로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중앙회에서 자금을 회수했지만 더 이상 간여했다간 노조탄압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다른 조합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모 조합은 직원들이 동요했고, 조합장은 버스 2대 대절해서 조합원들을 데리고 항의 방문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또 모 조합장은 이감사와 함께 지방 방송 기자와 카메라맨을 대동하고 자금회수 사유를 조합원들에게 설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달라고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러한 조합의 반발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밀릴 수 없는 상황. 전농노의 실태를 제대로 알리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반인륜적이고 불법적이고 반농협적인 그들의 행위를 프리젠테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최근 수년간에 걸쳐 벌인 노동 행위가 그들의 부당성을 설명하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안의농협의 예고없는 항의 방문시에 이 자료를 시의적절하게 활용하였고, 기세등등하게 들어 왔던 그들의 예봉을 꺾는데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도산농협의 대응은 기대보다 훨씬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안의 농협 임원방문과 언론사 취재도 성공적으로 대응했다고 판단했는데, 본부의 평가는 달라 보였다. 지방신문에 보도되고, 지방 TV에 보도되고 또다시 전국 TV 아침방송에 보도되자 초기 대응을 잘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잘 설명했더라면 보도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이 때쯤 자금회수를 푸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달간만 회수하면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 같았었는데, 계속 끌다간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중앙회가 농민 조합원들에게 돌아가는 자금을 회수했다.'는 조합과 전농노의 주장에 논리를 개발하여 설명해도 납득하지 않으려고 했고, 언론도 거기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전혀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질책만 되돌아 왔다. 하지만 조합장들이 본부를 방문하고 나름대로 외부 유력자에게 선을 대고, 전농노는 전략적으로 본부를 압박하자 분위기는 반전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분리 대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본부는 다 풀어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미리 안 모 조합장은 자금을 푸는 절차에 마저 비협조적이었다. 이 때문에 모 군지부장은 이리저리 곤란한 처지에 빠졌었다.

 

우리 조직은 약점이 많은 조직. '어디 가도 허리를 굽혀야 한다'는 어느 선배의 말씀이 지당하게 느껴졌다. 참 허탈하기도 했다만, 한편 생각하면 농협 전체의 방향에 어긋나는 조합에 대하여는 자금회수라는 강력한 제재 수단을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점에서 효과가 있었다.

 

싸움에 이기는 방법 중에는 지는 방법이 있다. 토론 내용에는 이기면서 토론 후에는 지는 경우도 있다. 대통령 후보자 TV토론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이는 작은 싸움에서는 이기면서 큰 싸움에서 지는 경우며, 싸움에 이기더라도 명분에서 지는 경우 일 것이다. 이번 싸움은 시작할 때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점에서는 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명분이 약한 싸움에서는 덜 손해보는 것이 최선이며, 그리고 장기전에서 강자를 이길 약자는 없다.

 

도산 농협은 노조를 해산했고, 전임 노조 간부도 복귀해서 평직원으로 근무중이다. 전농노의 투쟁목표가 조합원의 권익신장이 아닌 정치투쟁이고, 노조의 강경투쟁이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상황에서 노조원들의 참여는 갈수록 저조해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조합비를 내는 노조원의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한, 도산 농협과 같은 사례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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