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에서의 휴일
창원에 온지 두 달. 그동안 휴일중 한 번 빼고는 다 창원에서 보냈다. 애들도 다 켜, 큰 놈은 학교 옆에 방을 얻어 생활하고 작은 놈은 군대 있으니 애들 신경 쓸 일도 잔소리 할 일도 없어 굳이 서울 집에 갈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서울 오르내리락 하는 교통비도 만만찮고 시간도 많이 빼앗기는 것이 창원에서 휴일을 보내는 실질적인 이유일지 모르겠다.
별다른 연고도 없고, 처음 생활하는 창원인지라 휴일을 같이 보낼 마땅한 사람이 드문 것이 고민거리다. 가끔 직장 동료들과 같이 보내기도 하고 동창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가족이 있는 그들은 나처럼 자유로울 수 없다. 안해가 내려와 있을 때는 눈치도 봐야 하고 일요일에는 교회도 나가야 하는 약간의 속박속에 이럭저럭 휴일을 보냈엇는데, 안해 없는 온전히 자유로운 휴일에는 뭘 할까 고민스럽울 때가 많다.
어제 비온 후, 오늘 날씨는 완연한 봄날씨라는 일기 예보다. 일찍부터 일주일 동안 밀린 세탁하고, 청소하고, 안해에게 전화하고 어제 보온 밥통에 남겨둔 밥과 사과, 토마도로 아침을 하고 나니 8시반이었다. 오늘은 맘 먹고 대암산 입구에서 가는데 까지 하루종일 등산을 할 계획으로 일찍부터 서둘렸다.
얇은 등산복에 조끼를 걸치고 베냥에는 만일을 대비해 고어텍스 파커 넣어 출발했다. 걸어갈까 차를 몰고 갈까 망설이다가 길을 잘 모르고 중간에서 김밥과 약간의 간식을 사 가야하기에 차를 끌고 갔다. 대암산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중에 김밥 파는 집도 편의점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사는 아파트 상가까지 되돌아와 깁밥을 사고, 편의점에 들려 과일, 캔맥주, 초콜렛을 준비했다.
대암산 등산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한 오르막과 급한 오르막의 반복이었다. 걸으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내리막과 평지가 없어 계속 가픈 숨을 몰아 쉬어야 했다. 다소 빠른 걸음으로 앞 사람을 추월하면서 능선길에 오르니 오늘 넘어야 할 용제봉, 불모산 그리고 장복산에 이르는 능선이 창원 전역을 감싸고 이어져 있었다.
갈림길 벤치에서 갈증을 풀고 초콜렛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대충 8,9시간 걸릴 거리 중간중간 영양 보충이 필요했다. 용제봉으로 오르는 초반 길은 평탄한 흙길로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갈대숲과 관목이 이어져 햇볕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다소 흠이었지만 툭 터인 시야로 먼 산을 보고 진달래 봉오리에서 봄기운을 느끼며 산보하듯 걸었다.
봉오리 하나를 넘고 푹 꺼진 고개 골짜기를 지나 가파른 비탈 능선을 오르니 용제봉이었다. 용제봉은 창원 땅이 아니고 김해 진례 구역이다. 창원쪽에서 오르는 등산객을 몇몇뿐인데 용제봉 쪽에서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넘어왔다. 가슴에 명찰을 단 것을 보니 초등학교 동창모임을 용제봉에서 한 것 같았다.
용제봉 정산에 이르는 길은 버력길이었다. 바위가 용하게도 부서져 사람 혼자 들기에 적합한 크기로 흩어져 있었다. 이 돌들을 모아 탑을 쌓아 놓았다. 돌의 생김새를 잘 이용해 사람 키보다 더 높은, 어지간한 바람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돌탑을 여저기 쌓아 놓았다. 할 일 없어 이런 수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절한 소망을 성취하고 싶었거나 이 일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만사 제쳐 두고 몰입한 결과물일 것이다.
용제봉에서 불모산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내려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올라오는 등산객을 한두번 만난 것외에는 적막했다. 창원터널 위 고개까지 내려 오니 불모산 오르는 군사도로가 연결 돼 있었고 등산객들이 타고 빈차 몇대가 주차돼 있었다. 등산로 표지판은 군사도로를 가리키고 있는데 거리표시는 없었다. 얼마를 걸어야 불모산 정상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봄 나물을 찾고 있는 일행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완만한 오르막 군사도로. 나홀로 옛날 신작로를 걷는 기분으로 타박타박 봄 햇살을 느끼며 걷고 걸었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고 힘들지도 않았다. 훗날 계획하고 있는 국토 도보순례를 앞당겨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불모산 등산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 왔다. 그런데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길이었고, 등산객들이 매워 놓은 오르막 등산로 표시 리봉이 조금위쪽에 매여 있었다. 헷갈리기 십상이었다.
불모산 정상, 군부대 아래 무너진 비탈을 돌아 가니 왁짜찌껄 등산객들이 점심겸 술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등산보단 먹는데 더 의미를 둔 친목 모임같았다. 길을 물으니, 뭐니뭐니해도 등산 인심이 최고라면서 소주를 권했다. 뿌리치기 뭐해서 한잔을 받으니 또 한잔을 강권해 할 수 없이 빈속에 연거퍼 두잔을 했다.
알콜 기운으로 장복산과 시루봉 삼거리까지 가서 점심을 할 요량이었는데, 중간에 깊으 골짝이 있고 거리도 만만찮아 내리막, 멀리 바다가 보이는 장소를 택해 김밥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시간은 오후 1시반, 산을 오르기 시작한 후 4시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피곤한 탓인지 입맛이 써 두 줄 싸간 김밥을 다먹지 못하고 삼분의 일은 남겨 버렸다. 미리 고시례를 하고 먹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시루봉 갈림길에 오르니 진해시와 진해앞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멀리 장복산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산 등성 등산로에는 등산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안민고개까지 5.5키로. 보기에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데 2시간 이상 가야 하는 상당한 거리다. 진해쪽 산은 창원쪽과는 느낌이 다르다. 잡목에 듬성듬성 소나무가 있는 창원쪽에 비해, 비교적 잘가꿘진 검푸른 편백나무 숲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벚나무는 아직 겨울잠 중인데, 진달래는 분홍빛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등산로가 완만한지라 어린 꼬마를 대동한 부모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진해의 봄은 창원쪽보다 빨리 왔다. 오후의 강렬한 햇쌀과 봄기운을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안민고개 까지 쉬지 않고 내려왔다. 여기서 하산할 것인가, 더 나갈 것인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표지판이 없어 망설이던 중 '장복산 정상 2 키로미터 구간에 벚나무를 심었다'는 안내판을 보고 계속 산행을 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중간에 하산하는 것은 좀 억울한 것 같고, 거리도 얼마 남지않아 결정했는데 실제 거리는 이 보다 두배는 더 길었다.
이제 체력도 거의 바닥, 남은 물도 없고 오렌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진해만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곳에 자리잡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해다. 걷기 좋은 육산의 완만한 오름길. 들어 내쉬는 호흡에 발을 맞춰 뚜벅뚜벅 전진했다. 드디어 벚꽃나무 행렬이 끝나고, 다 왔겠구나 하는 안도감에 깃발 나부끼는 바위산 봉오리에 힘겹게 오르니 그곳은 목적지 장복산이 아니었다. 깃발은 산불조심 깃발이었고, 장복산은 한참 멋 곳에 떨어져 있었다. 맥 빠지고 당황스러웠다. 휴식도 취하고 등산로를 확인할 겸 쉬면서 뒤따라온 등산객에게 길을 물으니 자신도 초행이란다.
되돌아 가는 길도 멀고, 하산길도 없는 터라 전진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 개 남은 오렌지로 갈증을 다소 해소하고 장복산 정상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등산로도 돌밭길로 바뀌어 힘들고 조심스러웠다. 오가는 등산객도 사라졌다. 다행히 바윗길 등산로는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드디어 홀로 장복산 정상에 섰다. 멀리 창원쪽 정병산부터 비음산 대암산 용제봉 불모산 시루봉 삼거리 그리고 안민고개를 거쳐 여기 장복산까지 마치 커다란 말 발굽처럼 산들이 이어져 있다. 어떻게 왔을까 의심이 날 정도로 멀게 여겨졌다. 시루봉쪽으로 눈을 돌리니 정상 바로 밑에 '해병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왼편 동쪽 진해만에는 상선이 떠 있고 오른편 서쪽 아래로는 작은 동산 너머 해군사관학교와 군함들이 눈에 잡혔다. 어제부터 군항제는 시작됐는데 흰 벚꽃길은 보이지 않고 관광객을 유혹하는 유행가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장복산 터널까지 다시 1.2키로미터, 내려오는 길에도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벚나무밑으로 차나무밭이 조성돼 있었고,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편백나무 숲 밑도 차나무 밭이었다. 지리산 쌍계사 대나무 숲에서 딴 야생녹차가 좋다는데 앞으로 장복산 벚나무 녹차, 편백 녹차도 명성을 얻었으면 좋겠다.
드디어 더 전진할 수 없는 막다른 길, 군사보호구역 철조망이 능선 등산로를 막고 있었다. 오른쪽은 창원, 왼쪽은 진해. 이정표가 없어 망설이다가 오른쪽 등산로 접어 들었더니 느낌이 이상했다. 길은 부드럽고 낙엽은 다져지지 않아, 최근 사람 다닌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되돌아 진해쪽으로 하산해 마침내 마진터널 입구에 도착했다.
도착 시간은 오후 5시 10분. 거의 9시간 산행을 한 셈이다. 마산 창원 진해에 걸쳐 있는 산해진종주코스를 두번에 걸쳐 완주 한셈이다. 이번 답사를 경험 삼아 다시 하루 완주에 도전해야 겠다. 벚꽃길로 유명한 장복옛길을 따라 내려오다 포장마차집에 들려 갈증을 해소하고 칼국수로 허기를 채웠다. 그러다 보니 하루해가 저물었다. 피곤했지만 휴일 보내기는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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