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요즘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움을 느낀다. 운이 좋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리할 때가 되어서 인지 모르겠다.
아침에 티 타임 겸해 오늘 할 일 챙기고, 신문 보고, 이곳 저곳 전화걸고, 하나로 통신 들어가서 문서 메일 확인하고 나면 내 공식 일정은 끝난다. 그 때가 한 10시쯤이다. 처음 왔을 때는 모든 일이 걱정 스럽고, 귀찮게 구는 사람들도 많아 불안하고 쫒기는 심정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내 농협 생활중 이럴 때가 앞으로 또 있을까 싶다.
내 방은 전국 농협중에서 제일 멋진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방 크기는 내 보폭으로 한 스무 걸음 되고, 동쪽에는 벽면 반 크기의 창문이 있는데, 요즘 아침 나절에 스며드는 햇살이 그렇게 따뜻할 수 없다. 창너머엔 작은 대나무 숲이 있고 숲 앞에는 느티나무 3그루, 등나무 사각 벤치 그리고 배롱나무 무궁화 단풍나무 소나무 등등이 작은 정원을 이루고 있다.
이 정원이 좋은 것은 숨겨진 정원으로 사람들 왕래가 거의 없고 단지 아는 사람만이,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오기 때문이다. 나는 그 창문 옆을 왔다갔다 하기를 좋아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점심을 끝낸 직원들이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고, 애기에게 우유를 먹이는 엄마의 모습도 가끔 목격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보고 있는지 모르는지 편안하게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그렇게 정겹다.
요즘 더 자주 창문 곁을 왔다갔다 한다. 사람들의 모습은 좀체로 볼 수 없고 단풍나무 2그루가 상념에 젖도록 한다. 한 그루는 아직도 단풍잎을 달고 있고, 한 그루는 삭막한 가지를 드러내 놓고 있다. 옛날 같았으면 아직도 단풍잎을 달고 계절을 변화에 대항하고 있는 이런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껴었을 텐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고 안스럽다.
이것이 나의 변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법칙과 관습을 거부하는 창조가 아니라 순응하는 조화에서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 같다. 이런 내 생활의 변화가 근무하기 힘든다고 소문난 하동군지부에서 그런대로 소리 안나게 경영하는 비법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젊은 직원들 중에 창조성이 없는 무기력한 사람은 정말 좋은 인사고과를 안준다. 그런데 내가 다시 사무실 최고 경영자 자리를 내놓고 본부부서로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야 현명하게 사는 것인지 또 고민해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