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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

겨울 덕유산 눈길 종주

 

10월 14일 미국에 있는 정환이가 카톡으로

"지리산 종주한지가 얼마 안되는 것 같은데 벌써 3달이 넘었데!

12월 중순에 3박4일쯤 어디 한번 더 가자!!

나는 12월 13일 부터 21일 사이 언제든 가능!!" 연락이 왔다.

 

이에 윤태가 "덕유산 눈 산행 좋은데" 응답한 것이 계기가 되어

덕유산 겨울 종주를 계획하게 되었다.

일정은 15일 함양으로 내려가서 육십령 고개식당에서 자고

16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삿갓재대피소에서 1박하고

다음날 향적봉을 거쳐 곤드라를 타고 내려와 돌아오는 것으로 짰다.

 

당초 6,7명이 같이 가겼다고 희망했었는데 몇몇 사정이 생겨 결국 4명,

김정환 김정오 박진호 윤한철만이 가게 되었다.

덕유산 눈덮힌 종주능선을 타는 것은 오래전부터 나의 희망,

버킷리스트중의 하나였기에 다른 어느 산행보다 설레고 기다려졌다.

 

산행 며칠전부터 날씨가 어떻게 될까?

혹시 눈이 많이 와 입산 금지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는데

다행히 '눈이 조금 왔다가 그친다'는 예보에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동서울 터미널에서 15일 오후 3시20분발 함양행 버스를 탔다.    

 

오후 7시경 함양 '갑을 식당'으로 갔다. 

우리가 함양에 간다기에 함양이 고향인 병준이가 여동생에게 부탁해 알아봐준 식당이다.

소고기전문 식당인데 고기 질도 최상이고 값도 저렴했다.

 

특별히 정환이가 미국에서 양주를 가져왔다. 64.5도 'Brookers' 미국산 버번 위스키.

정환이는 매번 신세만 져서 미안하다고 가져 왔는데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맛있게 영양 보충하고, 양주는 2/3병쯤 마셨다. 소주를 한 두병 마신 기분이었다.  

   

 

예상 밖의 일이 터졌다.

식사후 기념으로 식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그만 오토바이 다리에 걸려 카메라를 든채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참담, 이마가 깨지고 내 안경은 두조각으로 부셔졌다.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보호했고, 그 순간이 카메라에 담겼다. 

  

 

불행중 다행!  상처는 응급처치 했고, 안경은 일회용 밴드로 감아 고정하니 아쉬운대로 쓸 수 있었다.

만약 큰 상처가 났거나, 안경이 산산조각 났더라면 산행도 못했을 수도 있었다.

택시를 타고 육십령 고개식당 겸 민박짐으로 가서 또 술을 마셨다.

술꾼 정오, 정환이 못 말리겠다. 난 다음날 오전 술기운 때문에 고생 좀 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때문에 걱정이 되기 보다 참 날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눈이 오지 않아 덕유산 눈이 거의 다 녹았다'는

민박집 주인 말을 듣고 은근히 눈이 내리기를 기대했었다. 

스패츠를 하고 아이젠을 매고 복장을 단단히 하고 9시쯤에 들뜬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꼭 동심으로 돌아간 것같다. 눈처럼 맑고 환한 표정.

 

 

 

눈은 오전중으로 그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눈은 점점 심해졌다.

댸피소에서 연략이 왔는데 오전 9시 30분에 대설 특보가 내렸고,

10시 30분경 진호 휴대폰으로 하산하는 게 좋다는 메세지가 왔다.  

이미 서봉가까이 까지 왔는데.

내려가나 올라가나 거리는 거의 비슷한데.

계속 가기로 했다. 

오히러 이런날 더 멋진 눈 구경을 할 수 있있다는 엉뚱한 오기도 발동했다.

  

 

 

눈은 계속 쌓여 갔고, 발목까지 빠지는 곳도 있었다.

러쎌을 하며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산행 속도가 느려졌다. 갈길은 아직 먼데 계속 시간은 지체됐다.

겨울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탓에, 이런 한겨울 눈산행은 처음인 탓이 컸다.

 

월성재에 오니 오후 3시가 넘었다.

황점 매표소로 내려갈 것인가, 삿갓재대피소로 계속갈 것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황점대피소까지는 내리막, 3.8km. 삿갓재대피소까지는 능선길 2.9km.

둘다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삿갓재대피소로 가기로했다.

 

   

 

등산로는 눈으로 덮혔고, 사람의 흔적은 이미 사라졌다.

형태만 느껴지는 눈길을 러썰하며 전진해야 했다.

내리막 일부 구간은 무릎깊이 만큼 눈이 쌓였다.

다행히 습설이 아닌 건설이라 러썰하는데 그다지 힘들진 않았다.

 

진호는 계속 뒤쳐졌다.

해떨어지기 전에 대피소에 도착하기엔 이미 글렸고,

이러다가 조난 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져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조난 당해도 표지목만 확보하면 큰 낭패는 보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은 있었다.  

나와 정환이는 먼저 가고 정오가 진호와 함게 오기기로 했다. 

조금이라 밝을 때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기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산에서는, 구름끼고 눈마저 리는 날이라 어둠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오후 5시, 랜턴을 켜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대피소까지는 1시간은 더 가야 했다. 

어둠은 더 짙어 갔고 그만큼 두려움은 더 커져 갔다.

 

그런데 자세히 등산로를 살피는 중 나무가지에 노란 야광비닐테잎

주기적으로 부착돼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구세주 같았다.

 

그리고 어둠속에서도 의외로 눈덮힌 등산로가 잘 보였다. 

능선길 나무는 키작은 관목이거나 산죽이 많아 등산로와 등산로 아닌 곳의 구분이 편했다.

만약 하산했더라면

키 큰 교목 사이로 난 눈 덮힌 등산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갔을 수도 있고,

조난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피소를 얼마 남기지 않고 우리 앞에 발자국이 나타났다.

참 반가웠다. 신경을 곤두세워 등산길 찾으라, 러썰하라 힘들었었는데 구조대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발자국은 사람 발자국같지가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일직선으로 나있었고, 더구나 앞굽은 없고 뒷굽만 있었다.

무서운 생각이 나면서도 누군가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도 생겼다.    

 

오늘 남덕유산에서부터 약 4시간동안 계속 러썰을 했고, 약 2km는 어둠 속에서 눈을 헤치며 왔다.

그동안 한 번도 길을 놓치지 않고 대피소를 찾았다.

행운이라는 생각,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9시에 출발했으니, 9시간 넘게 걸렸다.

육십령에서 삿갓재대피소까지 13.1km,

늦어도 오후 4시면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2시간이 더 걸렸다.   

     

대피소에서는 월성재에서 하산하라고 권했지만, 계속 대피소로 간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비올 때나 눈 내리는 상황에서 내려 갈 것인가, 대피소로 갈 것인가.

이번 경험으로 볼 때 대피소로 가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려갈 경우 비올 때는 계곡물이 불어 위험할 수 있고,

눈 올 때는 길을 잃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드디어 정환이와 나는 오후 6시에 대피소에 도착하고, 정오와 진호는 6시30분에 도착했다.

 

대피소에는 직원이 한 명 있었는데, 왜 하산하지 않고 왔나고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이럴때 대꾸는 하책, 그냥 들었다.

직원 왈, 27명이 하산하다가 조난 당해 직원들이 모두 구조 나갔단다.

그러면서 우리가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햇반을 끓이고, 라면을 끊여 소주에 허기를 채웠다.

다들 힘들게 와서 에너지가 방전돼서 그런지 잘 먹었다.

그런데 나는 음식이 당기지 않았다. 너무 피곤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바나나 한개를 먹고 나니 기운이 좀 돌았고, 소주를 몇 잔하고 나니 원기가 돌았다.

역시 술은 최고의 명약인가 보다.

 

 

대피소는 우리 뿐이었다.

예약한 다른 사람들은 다 등산을 포기했다.

우리는 침상이 아닌 뜨끈한 바닥에 모포를 깔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제 민박집에서는 잠자리가 불편하고 심하게 고는 코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푹 잘 잤다.

 

 

다음날 아침 7시 35분경, 아침 해가 떠 올랐다.

그름 사이로 삐죽 내민 태양이었지만 오늘 날씨, 좋을 것이라고 예고해주는 것이라 반갑고 기뼜다.   

 

 

처음으로 네사람이 대피소 직원 도움으로 한 앵글에 잡혔다.

어제의 피곤, 당혹감은 온데간데 없고 밝고 씩씩하다.

 

대피소직원은 오늘 등산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무룡산 정상까지가 험하고 눈이 많이 쌓여 있을 것인데 만약 힘들면 돌아 오고,

정상을 지나면 계속 가는 게 났다고 했다.

그리고 무리해서 향적봉까지 가지 말고

동엽령에서 안성대피소쪽으로 하산하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정말 어제보다 눈은 더 많이 쌓여 있었다.

아무도 간 흔적이 없는 푹푹 빠지는 눈길을 러썰하면서 나가는 기분 참 묘하고 짜릿했다. 

 

 

 

 

 

 

바람 센 능선길 나무는 상고대로 백색 트리가 됐고,

단길은 겨울궁전으로 가는 얼음길이 돼 있었다.

 

 

 

 

 

 

드디어 파란 하늘아래 펼쳐지는 덕유산 능선길,

고생없이 어찌 이 풍광을 볼 수 있겠는가.

 

 

파란 하늘아래 펼쳐진 눈꽃핀 나뭇가지는 불루모스크 장식한 아름다은 타일을 연상시킨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나무도 얼음 나무로 변했다.  

 

 

 

 

 

 

 

 

 

우리는 동엽령에서 향적봉을 향하지 안고 안성매표소로 내려 왔다.

거리는 비슷하지만 향적봉에서 하산하는 곤드라가 4시30분에 끊긴다고 해서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지쳐 있기도 했지만,

만약 향적봉에 4시30분가지 가지 못할 경우 걸어서 하산해야 하는데 그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매표소에 택시를 불려 무주읍으로 갔다.

안성에서는 덕유산 능선이 잘 보였다.

택시 기사말로는 눈 덮힌 덕유산이 히말리아보다도 더 아름답단다.

덕유산은 아름답다. 그런데 많이 힘들었다.

다음에 좀 편하게 곤드라 타고 향적봉가서 삿갓재에서 하산하는 등산을 한 번더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