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 봉평신라비 전시관 -죽변 - 부구 (박) - 나곡 - 월천 (27.3km)
* 해파랑길 26코스 일부, 해파랑길 27코스, 해파랑길 28코스 일부
이번부터, 3박 4일로 하던 트레킹 일정을 5박 6일로 늘리기로 했다. 그냥 특별한 생각 없이 3박 4일로 시작했는데, 이대로 계속하면 11월에 가서야 끝나게 될 것 같았다. 너무 기간이 늘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자신감도 생겨 7, 8월은 5박 6일로 하고, 9월까지 나머지 코스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변수는 날씨였다. 지금까지는 운 좋게 대부분 맑은 날씨였고, 비예보가 있어도 비다운 비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를 것 같았다. 일기예보로는 트레킹 기간 중 3일은 비가 온다고 하였다. 그것도 집중 호우가 예상된다고 했다. 안해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오히려 비 오는 날의 트레킹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판초우의를 준비하고, 작은 우산을 준비하고, 방수 스패츠도 샀다.
울진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와 남대천변을 걸어 연호정으로 갔다. 그런데 공사중이었고 사방이 함석 판널로 막혀 있었다. 7월의 연꽃은 장관 일터인데, 많이 아쉬웠다. 그런데 소나무 숲 모퉁이를 돌아서자 묵은 논이 나타났고, 그곳에 연꽃이 피어 있었다. 선홍빛 붉은 연꽃과 순백의 흰 연꽃이 아이처럼 맑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연호정 연꽃을 못 본 아쉬움은 한 숨에 다 날아갔다. 비록 넓지 않은 작은 묵은 논에 핀 몇 송이 연꽃이지만 여행자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묵은 논은 연꽃뿐 아니라 다양한 수생식물들로 멋진 생태를 형성하고 있었다. 물창포가 논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고요한 미풍에도 부들은 떨고 있었다. 그리고 어릴 때 개구쟁이 친구들과 뿌리를 파 먹었던 기억이 있는 큰매자기 군락지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런 풍경은 얼마 가지 못해 끝났고, 해파랑길은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연결됐다. 주변에 멋진 숲들도 많은데, 주민들이 다니는 산책로도 있을 법 한데. 아쉬운 마음 안고 낮은 언덕 고개를 넘자 동해 바다가 나타났다. 이제는 익숙해진 바다였지만 반가웠다. '관동팔경 녹색경관길'이라는 팻말도 보였고, '숨쉬는 땅 여유의 바다 울진' 여행 포스터도 눈에 띄었다. 포구마을 작은 모래사장에서 가족끼리 낚시하는 풍경도 정겹게 보였다. 하지만 포장도로를 계속 걷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흐린 날씨였지만 더웠고, 차들은 빠른 속도로 달려 여행 감성에 빠져 들 수가 없었다.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안내표지판이 나타났다. 해파랑길에서 200m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들어갔다. 넓은 주차장에 현대식 웅장한 건물이 나타났다. 그런데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몇몇 공놀이를 하고 있고, 텅 비어있었다.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조성돼 있고, 전시관에는 봉평리 신라비와 관련한 유물과 해설문 그리고 세계 각국의 비석 모조품이 전시돼 있었다. 봉평리 신라비는 1988년 전시관 바로 앞 개울에서 발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500년 전인 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로 발견 당시 가장 오래된 신라 석비였으며 국보로 지정되었다.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부족 국가였던울진지방은 5세기 무렵 신라에 복속되었다. 심한 차별대우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는 대군을 파견하여 난을 평정하고 주동자를 처벌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치하고 그 내용을 비에 담았다. 이 비석은 신라가 6세기 초에 동해안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였음을 보여주고, 당시의 제도와 시대 상황을 짐작케 해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후정리 도로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은 500년 향나무 노거수가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향나무를 신목으로 여기고 있으며, 옆에는 성황사가 있다. 이 향나무는 울릉도에서 파도에 떠밀려 왔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울릉도 도동 거북바위 서쪽 절벽에는수령이 약 2500년 된 향나무가 있고, 송광사 천자암에는 수령이 약 800년 된 곱향나무가 있다. 도동 향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향나무이고, 마치 두 그루가 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천자암 곱향나무는 기묘하고 경외롭기까지 하다. 후정리 향나무도 기품 있는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다.
늦은 오후에 죽변항에 도착했다. 고깃배가 들어오는 시간도 아니고, 경매 시간도 많이 지난 때라 한산할 줄 알았는데, 고깃배가 정박한 부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큰 비치파라솔 밑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고기잡이 나갈 채비에 분주했다. 그런데 분위기는 너무 차분했다. 대화도 없이 자기 맡은 일에만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왁자지껄, 생동감 넘치는 아침의 항구 풍경과 달리 엄숙함이 느껴졌다.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부정함을 피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죽변항을 돌아 등대 아래쪽을 지나니 푸른 동해 바다가 나타났다. 그리고 '용의 꿈길'로 이어졌다. 승천을 꿈꾸던 용이 승천의 소망을 이루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다시 육로로 접어들었다. 손주에게 보낼 옥수수를 따고 포장을 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습도 보였고, 잡초를 뽑는 노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고구마 줄기를 밭이랑에 올리고 예초기로 고랑에 난 바랭이 풀을 제거하는 농부의 모습도 보였다. 예초기로 산소 벌초하는 모습만 봐온 나에겐 신기했다. 고령화로 일손이 달리는 농촌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다. 장마철, 잠시 비가 멈춘 날은 농사일에 손주 생각에 더 바빠지는 것 같았다.
부구에서 밤을 보낸 다음날 새벽, 예보대로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인근에 있는 편의점에서 간편식을 사서 아침을 해결하고 길 떠날 채비를 했다. 짧은 바지를 입고, 비막이 스패츠를 발목에 차고, 배냥에 커버를 씌우고, 판초우의를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무슨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는 요원처럼 비장해 보였다. 내 차림은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씨에도 완벽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신발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방수가 되는 신발을 신었음에도 줄기차게 내리는 비속을 계속 걸으니 속수무책이었다. 질퍽거리는 신발을 신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등산이나 트레킹은 힘듬을 견디고 불편함을 참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체험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더욱 힘든 것은 비를 피해 쉴 곳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비는 쉴 새 없이 계속 내리고, 도로에는 대형 트럭이 쌩쌩 달리고, 그 어디 나그네 쉴 곳은 없고, 그 흔한 카페마저 눈에 띄지 않았다. 2시간쯤을 걸었을 무렵, 내리막길 옆 산자락에 쉼터가 나타났다. 너무 반갑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무계 쉼터'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조선 중기 박 씨 부부가 마을을 개척하고 '할무계' 불렸다고 했다. 그 후 마을 이름은 고포로 바뀌었다. 판초우의를 벗고, 배냥을 내리고, 신발과 양말까지 벗고 휴식을 취했다. 젖은 신발에 발은 곱아 쭈글쭈글 해지고, 감각마저 무디져 있었다.
'조선시대 임금님의 진상품 고포돌미역' 입간판을 뒤로하고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해파랑길 안내표식이 보이지 않았다. 두 번이나 오르내리락 하고, 또 헬기장까지 올라갔지만 해파랑길 표찰이나 리본을 발견할 수 없었다. 짐작 건데 헬기장 올라왔던 반대편 길로 내려가면 될 듯했지만 마음 한구석 불안함이 느껴져, 해안도로로 가기로 마음을 바꿔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지만, 해안길은 편하고 조용했다. 무엇보다 월천에서 아름다운 당산을 만나는 행운이 뒤따랐다. 팽나무 가지가 당산을 감싸고 있는 풍경은 내가 본 당산 중에서는 최고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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