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송정 - 기성 공용정류장 - 기성망양(박) - 망양휴게소 - 망양정 - 울진 (31.2km)
* 해파랑길 24코스 일부, 해파랑길 25코스
하늘이 흐려 멋진 해안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가 아름다운 소나무 숲에 들어섰다. 멋진 해송, 곰솔 숲이었다.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소나무 숲을 많이 봐 왔는데, 숲만 놓고 봤을 때는 이곳 소나무 숲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움이 좋았다. 숲과 탐방로가 확실히 구분돼 있고, 숲에는 소나무만 있는 게 아니라 숲 아래 풀이 초록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참 숲이 아름답습니다. 숲 이름이 뭐예요' 물었더니 '월송'이라고 했다. 숲을 지나자 습지가 나타났고, 또 다른 소나무 숲 속에 정자가 보였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월송정이었다. 정자 위에 올라서니 푸른 소나무 숲 사이로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보였다. 참 좋은 자리, 명당이란 생각이 절로 났다. 옛 선인들의 자연을 보는 안목에 감탄했다.
뙤약볕이 내려 쬐는 해안 도로를 걷다 보니 목도 마르고, 지쳐가는 느낌이 들었다. 울진공항 4차선 넓은 대로를 지날 때는 피할 수 있는 그늘이 전혀 없어 우산을 양산 대용으로 썼다. 불행 중 다행, 오늘은 운 좋게 12시도 되기 전에 '기막힌 솥밥' 식당을 발견했다. 망설이지 않고 식당에 들어갔다. 먼저 온 사람들이 두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었다. 그들은 다 잘 아는 사람 같았고, 귀동냥으로 들으니 군 예산이 어쩌고 저쩌고 지역에 영향력 있는 유지들로 보였다. 오랜만에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냉커피까지 시켜 마시는 여유를 부렸다.
가로수 그늘 밑을 지나고, 들 가운데 논길을 지나고, 낮은 고개를 넘자 반갑게도 양봉농장이 모퉁이에 나타났다. 주인은 60대 부부였고, 벌통은 300개가 넘었다. 지금이 한창 바쁜 시기라 생각하고 참 바쁘시겠다고 인사를 건넸더니, 뜻밖에 올 양봉 농사는 끝났다고 했다. 아카시꿀, 잡꿀, 밤꿀 세 차례 채취가 끝나면 꿀을 더 딸 수 없다고 했다. 이 시기가 지나면 꽃의 꿀이 벌 먹이로도 부족해 설탕을 먹여야 한다고 했다. 요즘 벌꿀은 잘 팔리나고 물었더니, 그런대로 나간다고 하시면서 새끼 양봉을 분양하는 게 쏠쏠하다고 하셨다.
장마철 날씨는 시시때때로 변해 종 잡을 수 없다. 햇볕이 쨍쨍 내려 쬐던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더니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비가 내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서울, 강우 주의보가 발령된 영동지방에 비하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촌은 한가로웠다. 비내리는 해파랑길은 더더욱 적막했다. 피데기 오징어를 파는 길가 가계들이 눈에 띄었으나 문을 연 집은 한 군데도 없었고, 길옆 방파제를 따라 설치된 오징어 건조대는 빈 채로 서있었다. 그럼에도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울진 구간 해파랑길은 어느 구간보다 깨끗하고 잘 정비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리도 깨끗했고, 잘 가꾼 향나무 가로수길도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을 흰 페인트로 칠해 감춘 어색함이 없어 좋았다.
기성망양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길가에 모텔이 보였다. 시간상으로는 더 걸을 수 있었으나 욕심을 접고 모텔로 들어갔다. 그런데 모텔 여사장이 부근에 저녁을 먹을 식당이 없고 망양휴게소까지 가야 식당이 있다고 했다. 낭패한 얼굴로 어쩔 줄 모르고 서있으니 고맙게도 라면은 끓어 줄 수 있다고 했다. 짐을 풀고 사워를 하고 내려오니, 계란 풀은 라면에 김치 그리고 막 지은 쌀밥 한 공기도 덤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식탁 위에 두 잔쯤 남은 소주병이 보이기에 마셔도 되나고 물었더니 방금 손님이 남겨두고 간 것이라면서 마셔도 된다고 했다. 그날 저녁 라면은 그 어떤 식사보다 맛있게 먹었다. 그것도 단돈 3천 원에.
대게의 원조! 울진. 황금울진대게 공원에 도착했다.
대게 하면 영덕대게로 불리는 게 억울한 모양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대게가 울진에서 생산되고, 옛 문헌 동국여지승람, 임원 경제 등에도 대게는 울진의 주요 토산물로 명시돼 있다고 한다. 대게의 주요 서식지인 왕돌초라는 수중 바위도 울진 앞 동해바다에 있다고 한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상대적으로 교통이 편리한 영덕이 대게 집하지 역할을 하게 되어 영덕대게로 불리게 되었는데, 실제로 대게의 원조는 울진대게라고 주장하고 있다.
망양휴게소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시켜 먹을까 생각하다, 편의점에서 간편 음식을 사서 먹고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에 트럭들이 줄을 서 있고, 식당에는 아침인데도 손님들로 분주했다. 기사분들이 휴게소를 찾지 않고 이곳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많은 투자를 하여 조성한 휴게소가 외면당하고 있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망양정로로 접어들었다. 해안을 따라 왕피천까지 이어진 망양정로는 정말 아름다웠다. 30여 년 전, 지금은 다 자라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있는 아들 두 녀석을 데리고 성류굴에 갔다가 이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한 적이 있다. 그때는 아마 비 포장도로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 기분 좋은 추억이 돼 살아났다. 촛대바위는 여전히 늠름하고 멋있게 우뚝 솟아 있었다. 해안가 바위 위에 서있는 정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마른 목도 축였다. 궂은 날씨만 아니었더라면 더 멋진 풍광에 매료되었을 터인데, 아쉬웠다.
바닷가 얕은 둔덕 산위에 날렵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원래 망양정은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망양휴게소 아래쪽에 있었다. 현재 그곳에는 당시 망양정을 복원해 놓았다. 현재의 망양정에 대해 '후세 사람들의 안목이 고루하여 읍치에서 조금 멀다는 이유로 강과 바다 사이로 옮겨 지었다'라는 평도 있었다. 그런 평을 보았기 때문인지, 현재 망양정이 있는 '해맞이 망양정 공원'은 뭔지 모르게 과하고, 정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점심때 무렵 울진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옆 길에 기사식당이 있길래 갔더니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았다. 다음 골목을 돌아가니 추어탕 간판이 보였고, 한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추어탕을 시켰다. 그런데 놀랍게도 추어탕 재료인 미꾸라지가 울진에서 잡은 자연산이라고 했다. 믿기지 않았다. 정말 자연산 맞나고 되물었더니 통발을 놓아 직접 잡는다고 했다. 다슬기 국도 직접 잡은 자연산으로 끓인다고 했다. 무청을 듬뿍 넣은 추어탕을 맛있게 먹었다. 한 때 농약 과다 사용 등으로 수질과 토양이 오염돼 미꾸라지와 다슬기가 사라졌었는데, 되돌아왔다고 하니 자연생태가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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